지금의 이탈리아와 독일·프랑스는 본디 한 뿌리였다. 8세기 서유럽에서 게르만족이 세운 최초의 통일국가 프랑크왕국이 시발점이다. 통일의 위업을 이룬 이는 샤를마뉴 대제였다. 그가 죽고 넷째 아들인 루이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새 황제는 아버지 샤를마뉴와 달리 성격이 유약하고 카리스마가 전혀 없었다. 쉽사리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탓에 세 아들은 제국을 차지하려고 혈투를 벌였다. 일명 ‘형제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큰아들 로테르 1세는 이탈리아(북부)지역을 차지했다. 차남 루이 2세는 동프랑크(독일 지방)를, 막내아들 샤를 2세는 서프랑크(프랑스 지방)의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서유럽의 강자 프랑크 왕국이 손자 세대에서 형제 간 다툼으로 360여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역사의 기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권력을 놓고 골육상쟁은 반복되고 있다.
가장 최근 국제적 이슈를 불러일으킨 형제 간 권력다툼은 싱가포르에서 일어났다. 지난 2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삽시간에 번진 사진 하나가 싱가포르를 뜨겁게 달궜다. 싱가포르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 전 총리의 차남 리셴양과 신당 창당 계획을 밝힌 탄첸보크 전 의원이 거리의 한 포장마차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나란히 앉아 미소 짓는 모습이다. 의례적인 사진 같지만 이 사진이 주목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의 동생과 오는 2020년 4월 총선을 대비해 신당 창당을 선언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의 만남이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 클레멘티 내 한 시장에서의 조찬 만남 후 3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이 사진 한 장으로 갖가지 해석이 뒤따른다. 탄 전 의원은 2006년까지 싱가포르 여당인 인민행동당(PAD)의원을 지내다 지난달 중순께 야당 격인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지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불과 0.34% 득표율 차로 2위를 차지하며 친여당 성향의 토니 탄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줬던 탄 전 의원은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아 리셴룽 총리에게 강력한 견제구를 날릴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현재 싱가포르의 권력은 리셴룽 총리가 장악하고 있지만 나이가 많아 곧 차기 총리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다. 후보군 물망에는 리셴룽 총리의 아들 리홍이와 리셴양의 아들 리셴우가 오르고 있다.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트타임스는 “리콴유 전 총리에서 시작해 ‘3대째로 이어지는 권력’을 놓고 현 총리와 그 동생이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쥐여주기 위해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싱가포르의 21세기판 ‘형제의 난’으로 불리는 싸움의 시작은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등은 리콴유 전 총리가 남긴 낡은 저택의 처리에서 시작됐다. 2015년 타계한 리 전 총리는 이 집을 성역으로 만들지 말고 허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장남인 리셴룽 현 총리가 유언을 어기고 기념관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 남동생 리셴양과 여동생 리웨이링 싱가포르 국립뇌신경의학원 원장이 들고 일어났다. 리 총리가 아들 리홍이에게 권좌를 넘겨줄 계획으로 부친의 우상화를 시작했다는 게 동생들의 의심이다.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이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 ‘왕조정치’를 꿈꾼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권력이 큰형의 부자 간으로 이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속내가 담겼다는 게 싱가포르 정치권과 언론들의 관측이다.
권력을 놓고 다투는 사이 세계 제일의 청렴국가로 불리는 싱가포르 국민들은 실망감과 충격에 빠졌다. 총리 일가의 내분과 폭로가 지속되면서 2017년에는 의회에서 청문회까지 개최했다. 이 때문에 리 총리와 형제들은 이 문제를 현실정치가 아닌 사적 영역에서 풀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공개적인 싸움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동생 리셴양이 형에게 맞서 싱가포르 내 ‘또 다른 힘(탄첸보크가 이끄는 신당)’과 결탁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권좌를 향한 신경전이 다시금 불붙는 모양새다. 형제의 난에 대한 불만과 세습통치에 대한 싱가포르 국민의 피로감은 높다. 현지 언론이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916명 중 절반이 리 패밀리 3대의 정계 입문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권력을 놓고 벌어진 형제 간 다툼은 싱가포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인도양의 유명 휴양지인 몰디브에서는 15일간의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돼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대법원은 구금된 야당 인사 9명에 대한 재판이 정치적 의도로 이뤄졌다며 석방 명령을 내렸지만 당시 압둘라 야민 몰디브 대통령이 이 같은 석방명령 이행을 거부해 정국 불안이 생겼다. 이 사안의 이면에는 이복형제 간의 신경전이 있다. 마우문 압둘 가윰 전 대통령은 야민 당시 대통령과 이복형제 사이지만 야민 정권을 비판하며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야당의 입장을 지지했다. 야민은 지난해 9월 대선을 앞두고 정적 체포와 언론탄압 등 강압 행위로 대통령 자리를 고수하려 했으나 이복형이 빌미가 돼 결국 대선에서 패배하며 권좌에서 물러났다.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피로 얼룩진 형제 간 다툼은 최근에도 일어났다.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에서다. 현재 중동 군주국 다수는 형제 상속이나 아들 상속으로 왕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사우디의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은 형제계승 원칙을 깨고 2017년 6월 장남인 무함마드 빈 살만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했다. 국왕은 ‘궁중 쿠데타’를 통해 이복동생이자 제1 왕위계승자였던 나예프와 그의 아들을 제거하고 잠재적 경쟁자를 대거 숙청하면서 아들 빈 살만의 통치기반을 닦았다. 이익과 노선에 따라 피도 눈물도 없는 다툼과 전근대적 담합이 21세기에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