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잔치였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미북 정상의 역사적 하노이선언을 기대했지만 협상은 결렬됐다. 철저한 준비 없이 진행해온 비핵화 협상이 민낯을 드러내며 안타까운 외교 참사로 이어졌다. 양측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다음을 기약했지만 북한의 지나친 욕심은 비핵화 협상의 앞날을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나쁜 거래보다는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정상회담 직후 들려오는 미북 양측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서로가 생각하는 거래의 조건이 크게 달랐다. 북한은 사실상 핵심적인 제재를 모두 해제해달라고 하면서도 영변 핵시설만을 내놓으려 했다. 지난 2016년 이후의 대북제재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북한 경제 전반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아무리 ‘민생’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말을 돌렸지만 사실상 북한이 아프게 느끼는 모든 제재를 해제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미국의 미공개 농축우라늄시설 포기 요구는 거절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 개념이 다르다고 밝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없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왔겠냐”고 답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비핵화는 우리의 그것과 달랐다. 6자회담 9·19공동성명에서 의무화한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2016년 7월6일 북한 정부대변인 성명에서 밝힌 조선반도 비핵화임이 드러난 것이다.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복귀’하는 비핵화가 아니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며 핵군축 협상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한 후에야 핵무기를 포기’하는 비핵화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 주장에 일일이 반박했던 리영호 외무상이 비핵화 개념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요구대로 거래했다면 북한 비핵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을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개념대로라면 다음 단계인 미공개 농축우라늄시설의 비핵화 조치를 얻어내기 위해 제공해야 할 상응조치는 한미동맹 해체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핵무기가 남아 있는데 한미동맹을 먼저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북한의 의도를 알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과감히 협상을 끝냈고 그 결정으로 협상은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하마터면 북한의 ‘조선반도 비핵화’ 꿈을 실현시켜줄 뻔했기 때문이다.
협상 결렬의 충격은 북한의 김 위원장이 더 크게 느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통적으로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지지해온 공화당 지지층에게 소신 있는 대응을 한 것으로 비칠 것이다. 따라서 그 충격은 제한적이다. 반면 이미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에 정상회담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김 위원장은 체면이 크게 손상됐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이들 매체는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됐다고 계속 홍보하겠지만 김 위원장의 주변에는 이번 출장에 동행한 200여명의 수행단원이 있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고 김 위원장도 이를 잘 알 것이다.
새로운 대북접근이라는 소위 ‘톱다운’ 방식도 이제는 빛이 바래버렸다. 실무진의 충분한 준비 없이 개최된 정상회담에서 큰 입장 차를 노출해버렸기에 어느 일방이 양보하지 않으면 다음번 회담은 개최하기가 더 어렵게 됐다. 하지만 미국은 국제비확산체제를 유지해야 하기에 입장 번복이 어렵다. 북한 역시 최고 존엄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없다. 그 결과 다음번 회담은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 정부는 다시 한 번 중재자의 역할을 다짐하고 있지만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 의욕은 높게 평가하지만 정세 변화의 흐름과 정확한 역할을 알아야 한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는 미국에 제재완화를 먼저 요구하게 될 경우 한미 간 갈등으로 불거져 소중한 동맹만 약화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북한에 비핵화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가시적인 비핵화 로드맵에 합의해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도, 미국의 지지도 모두 잃어버린 채 국가의 안보만 위태롭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