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늑대소년(2012년)’은 투자사의 입맛에 따라 시나리오가 난도질당하는 일이 다반사인 충무로에서 보기 드물게 큰 의견 충돌 없이 일사천리로 완성된 작품이다. 투자·배급을 담당한 CJ엔터테인먼트는 신인급 감독의 작품임에도 ‘늑대소년’의 시나리오 초고만 보고 투자를 결정했다. 청춘 스타인 송중기와 박보영의 가세는 힘차게 달려나갈 채비를 하는 프로젝트의 양어깨에 날개를 달아줬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캐스팅과 촬영, 후반 작업까지 한달음에 주파한 ‘늑대소년’은 700만 관객의 사랑을 받으며 한국 멜로 영화의 신기록을 썼다. 영화를 제작한 비단길의 김수진 대표는 “투자사가 작품을 마음에 쏙 들어 했고 현장에서도 큰 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1년에 몇 편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며 행복했던 제작 과정을 돌이켰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의 ‘물영아리 오름’은 6년 넘게 깨지지 않는 멜로 영화 흥행기록을 보유한 ‘늑대소년’의 촬영지다. 순이(박보영)와 늑대소년(송중기)이 동네 아이들과 공을 차며 뛰어놀던 장면을 찍은 곳으로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도 특별한 매력을 품은 관광명소다. 활엽수가 내뿜는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30분 정도 천천히 걸으면 둘레 1㎞, 깊이 40m가량의 습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정상에 분화구처럼 생긴 습지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판타지 멜로를 표방한 ‘늑대소년’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온 듯 신비하고 몽환적인 풍경에 한 번 더 놀란다. 습지 식물을 비롯해 양서류·파충류 등 다양한 생명체를 품은 물영아리 오름의 습지는 그 생태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지난 2007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늑대소년’은 순박한 동화의 탈을 썼지만 그 이면에는 나와 다른 남을 향한 편견을 깨고 타자를 껴안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담겨 있다. 삐죽삐죽한 머리에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소년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평화를 깨는 침입자다. 구청에서 소년을 돌봐줄 시설을 마련할 때까지만 함께 지내자는 엄마의 제안에 순이는 입이 툭 튀어나온다. 맹수들이 우글대는 정글에 있으면 딱 어울릴 법한 외모에 혀를 끌끌 차고, 음식만 보면 게걸스럽게 손으로 먹어치우는 모습에 혀를 내두른다.
그랬던 순이가 어느 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시원하게 펼쳐진 오름 한복판에 소년을 불러 세운다. 조련사라도 된 듯 순이는 “먹어!” “기다려!”라는 구령과 함께 두툼한 감자를 내밀었다 뺐다를 반복한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달려들기만 하던 소년도 금세 말을 깨우치고 소녀의 구령에 반응한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만나 차이를 극복하고 교감하는 순간이다. 마음의 문을 열어젖힌 순이는 이제 소년을 위해 ‘가나다라…’ 글자를 가르쳐주며 한층 적극적인 소통을 꾀한다.
풋사랑의 설렘이 스민 둘의 교감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순이를 아내로 맞고 싶어 하는 지태(유연석)가 무리하게 음모를 꾸밀 때마다 늑대로 변신한 소년은 포악한 본성을 드러낸다. 참다못한 군인과 경찰, 마을 사람들은 총을 들고 소년을 쫓는다. 이들을 겨우 따돌린 소년은 물영아리 오름에 자리한 산책로에서 순이와 작별한다. 소년은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데 매정한 순이는 “빨리 도망가라”며 등을 떠민다. 가파르지 않은 경사 위에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뒤로하고 소년과 순이는 헤어져야만 했구나’ 싶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 온다.
액자 형식으로 구성된 영화의 문을 여닫는 것은 백발의 할머니가 된 순이의 이야기다. 에필로그에서 순이는 소녀 시절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 인근에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시골로 향한다. 하얗게 세어버린 자신의 머리카락처럼 색이 바랜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그날 순이는 47년 만에 소년과 마주한다. 한쪽은 할머니가 됐는데 비상한 초능력을 지닌 소년은 옛날 그 모습 그대로다. 가만히 있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찰나, 소년은 울고 싶은 사람의 뺨을 때리듯 47년 전 미처 전하지 못했던 쪽지를 꺼내 보여준다. 누렇게 변한 쪽지에는 ‘기다려 나 다시 올게’라는 글귀가 또박또박 적혀 있다.
이것은 순이의 환상일까, 아니면 하늘이 선물한 기적 같은 현실일까. 전자라면 우리는 순이의 가슴 사무치는 상상을 본 것이요, 후자라면 반세기를 참고 기다린 끝에 소망을 이룬 소년의 벅찬 감동을 함께 나눈 셈이 된다. 어느 쪽이든 눈물 나기는 마찬가지다. /글·사진(서귀포)=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