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 4시 30분 전엔 와야 그나마 따뜻한 곳에서 줄 설 수 있어요”
새벽 5시가 채 안 돼 아직도 어둠이 깊은 시간. 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길게 늘어선 줄에 기자가 허탈해하자 그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건물 안쪽에 자리를 잡은 한 학부모가 말을 걸었다. 결국 기자의 자리는 찬 바람을 가릴 곳도 없는 야외 대기 줄의 맨 뒤가 됐다. 기자의 앞은 이미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 23일 토요일 새벽, 기자는 서울 대치동의 한 학원을 방문했다. 이날 이곳에서는 이른바 ‘일타강사(인기가 많아 수강신청이 첫 번째로 마감되는 강사)’로 불리는 유명 강사의 수업이 있었다. 전국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듣고 싶어 한다는 수업이기에 수강신청부터 실제 수업을 듣기까지 전 과정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매주 주말 새벽이면 비슷한 긴 줄이 늘어서는데 다름아닌 오전 8시부터 시작되는 수업의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다. 지난달에는 3월부터 개강하는 이 수업의 수강 신청을 위해 더 긴 줄이 서기도 했다.
줄 선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대다수가 학부모들이었다. 공부하기 바쁜 수험생 자녀를 대신해 새벽잠을 떨치고 나온 엄마들이다. 낚시용 간의 의자부터 담요, 이북(E-book) 리더기 등 편하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이들은 상황이 익숙한 듯 꼼짝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학부모들에 따르면 새벽 4시 30분 전에 학원에 도착한 사람들은 건물 안쪽에 줄을 섰고 간발의 차이로 늦게 도착한 이들은 건물 야외의 주차장에 줄을 섰다.
#2. “‘줄서기 알바’요? 들어보긴 했는데 굳이 그렇게까진…”
줄을 선지 불과 10분 정도 지났는데 졸림과 추위가 엄습했다. 옷을 껴입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3월의 새벽바람은 꽤 매서웠다. ‘줄서기 아르바이트(알바)’가 절실히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최근 이처럼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줄서기 알바’가 온라인 상에서 성행 중이다. 특히 대치동 학원가는 강의 앞자리를 차지하거나 강의 신청을 하려는 사람들을 대신해 매주 주말 새벽부터 줄을 서주는 알바가 매우 인기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줄서기 알바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고3 수험생을 아들을 대신해 줄을 서러 왔다는 학부모 A씨에게 ‘줄서기 알바’를 아느냐고 묻자 “들어보긴 했다”면서도 “굳이 다른 사람을 줄 세우기까지 해서 아이들 수업을 듣게 하긴 좀 그래 나는 써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줄서기 알바를 고용하는 것이 어딘가 반칙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A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줄서기 알바가 떳떳지 않다는 생각에 대부분은 굳이 티는 내지 않을 것”이라며 “여기도 아르바이트생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3. “괜찮아요, 새치기하는 것 같아 싫어요”
줄을 선 지 2시간쯤 지나자 학원 직원들이 출근했다. 주차장 밖까지 길게 늘어서 족히 수백 명은 넘어 보이는 줄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업이 시작하려면 시간이 남았지만, 학원 문이 열렸기에 강의실 앞의 좌석 배치표에 이름을 적어 넣을 수 있다. 드디어 고된 줄 서기에서 해방된 셈이다.
두 시간 가량 추위와 졸림과 싸운 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기자의 눈에 직접 줄을 섰던 앳된 얼굴의 학생이 들어왔다. 고등학생이라는 B씨는 다들 부모님이 줄을 서주러 왔는데 왜 직접 줄을 서러 왔느냐는 질문에 “가족이 대신 줄 서러 나올 여건이 안돼 직접 나왔다”고 말했다. 기자가 맡아 놨던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하자 B씨는 사양했다. 아무리 한 사람이 빠져서 생긴 자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줄 서 있는데 혼자 앞으로 가는 것이 새치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4. “대치동 줄서기 알바 구합니다”
정작 학원 앞에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던 ‘줄서기 알바’지만 온라인에서는 사실 매우 성업 중인 사업이다. 특히 학원 줄서기 알바는 대개 새벽 5시부터 시작돼 아침 일과가 시작하기 전 끝나고, 통상 시급 1만원부터 시작해 인기가 많다. 매주 많은 온라인 사이트가 정기적으로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5시간가량 대신해서 줄을 서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줄 서는 위치는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치동의 유명 학원이다. 수업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좌석 예약 줄서기’가 아니라 학원 접수에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려 아예 하루 단위로 사람을 구한다. 전날부터 줄을 서야 하는 ‘밤샘’ 일자리인 셈인데 대신 일급이 10만원으로 꽤 많다. 구인 글은 한 사이트에만 수십 개가 게재돼 있다. 게재된 구인 글은 대부분 마감됐으며 하나의 일자리에 많게는 7명이 지원하기도 했다.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대치동 줄서기’ 구인을 아는 한 네티즌은 직접 블로그에 자신의 경력을 인증하며 “대치동 줄서기 해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5. “한의원 줄 서기 알바 7시간 째….”
줄 서기 알바는 대치동 학원가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유명 아이돌 콘서트 현장이나 유명 패션 브랜드의 한정판 제품 판매 등의 이벤트가 벌어지면 줄 서기 알바는 반드시 기승을 부린다. 일례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7시간째 유명 한의원 진료 줄을 서고 있다는 글이 올라온 적도 있다. 작성자는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몰려드는 한의원이라 전날부터 밤샘 줄서기는 필수라는 한의원에 앞에서 핫팩과 담요, 돗자리를 무기 삼아 줄을 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글이 게시된 시간이 새벽 1시였고 “오전 7시까지 버텨야 한다”는 글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작성자는 13시간가량 남을 대신해 줄을 선 것이다. 그밖에 아파트 분양 추첨권을 대신해 줄을 서는 알바도, 한강 월 주차권 신청을 대신해 줄을 서는 알바도 존재한다.
#6. 정당한 노동력 구매일까, 반칙 혹은 새치기일까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A씨나 B씨처럼 대다수 사람들은 ‘줄서기 알바’에 찜찜함을 느낀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마감된 수 많은 ‘줄서기 알바 구인글’이 보여주듯 돈을 주고 대신 줄을 서주는 ‘노동 거래’는 활발하게, 그리고 몰래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다. ‘줄서기’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권력자도 평범한 시민도 똑같이 줄을 서야 한다는 점에서 평등하며 도덕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돈을 주고 ‘줄서기 알바’를 고용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돈을 주고 샀다는 점에서 비난받기 쉽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썼던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 역시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줄서기 알바(라인 스탠더)’를 고용하는 것은 줄서기가 가진 평등주의적 원칙을 깨부수고 도덕의 범주 안에 있는 줄서기를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의 논리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와 학원가에서 나타나는 줄서기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예컨대 부모님이 바빠 새벽 줄서기를 도와줄 수 없어 직접 줄을 서야 했던 고등학생 B씨의 경우 장기간 추위와 싸우느라 정작 강의가 시작되면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대신 줄을 서 줬던 학생에 비해 불리한 상황인 셈이다. 똑같이 두 명의 학생이 줄을 서는데 한 명은 대치동에서 살고 다른 한 명은 수원에서 사는 경우면 어떨까. 수원에 사는 학생이 3만원으로 줄서기 알바를 고용해 컨디션을 지키는 것을 반칙으로 봐야 할까. 한 학부모는 “나 역시 자녀를 위해 줄 서기를 직접 해 본적 있어 겸연쩍다”면서도 “애당초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양질의 교육을 균등하게 받을 수 있다면 이런 소모적이고도 무의미한 줄서기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글·사진=정현정 인턴기자 jnghnji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