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나라 살림이 사상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서는 ‘초슈퍼예산’으로 편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가 경제활력 제고를 위해 확장적 재정정책을 이어간다고는 하나 세수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현금복지가 줄줄이 늘어나 재정적자 우려가 크다.
기획재정부는 26일 국무회의에서 ‘2020년 예산안 편성 및 기금운용계획안 작성지침’을 의결·확정했다. 4대 중점분야로 △활력이 꿈틀대는 경제 △내 삶이 따뜻한 사회 △혁신으로 도약하는 미래 △안전하고 평화로운 국민 생활 등을 꼽았다. 고교 무상교육, 한국형 실업부조 등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 대거 정부 예산안에 포함되면서 현금복지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고교 무상교육은 내년에만도 1조4,00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 한국형 실업부조는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실업급여를 받을 자격이 없는 저소득층 구직자의 생계를 돕는 사업이다. 이에 더해 실업급여 보장성 강화, 기초연금 확대 등 재정운용의 경직성을 높이는 복지·의무 지출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미세먼지 대응 예산도 대폭 늘린다.
이에 따라 국가 예산 규모는 지난 2011년 300조원을 넘은 뒤 2017년에 400조원을 돌파했고 불과 3년 만에 500조원을 초과하게 됐다. 정부는 지난해 마련한 ‘2018~2022년 국가재정 운용계획’에서 내년 재정지출 규모를 올해 정부 예산안(469조6000억원)보다 7.3% 늘어난 504조6,000억원으로 전망했다. 현 정부에서 매년 30조~40조원씩 예산을 확대함에 따라 재정건전성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각 부처 재량지출을 10% 이상 구조조정할 방침이다. 하지만 세수증가 추세는 내년부터 본격 둔화할 것으로 보이고 재정수지 적자와 국가채무 증가속도는 한층 빨라질 것으로 우려된다.
안일환 기재부 예산실장은 “투자·수출 부진이 해소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데다 성장잠재력의 추세적 하락도 우려돼 내년에 경기 대응, 소득 재분배, 혁신성장에 중점을 두고 적극적으로 재정을 운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재부는 구체적인 재정지출 규모와 관련해 “(올해와 내년) 세입 측면에서 분석이 더 이뤄져야 지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며 언급을 피했다. 예산안 편성지침은 각 부처가 요구할 수 있는 예산안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다. 개별 부처는 오는 5월 말까지 예산요구서를 기재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고교 무상교육·실업부조에만 수兆원 훌쩍...미래 안보고 혈세 펑펑>
26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문재인 정부 4년 차(2020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에는 나랏돈을 더 적극적으로 풀겠다는 정부 의지가 담겼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적극적으로 재정을 운용하겠다는 기조하에 4대 분야에 재원을 집중 배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경제 활력 제고와 복지 확대를 위한 확장 재정 원칙을 천명함에 따라 내년도 총지출(예산+기금)은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밑천’이 되는 세입 기반은 약화해 재정 건전성이 빠르게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재정 당국 스스로도 “국가채무 증가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며 ‘셀프 경고음’을 냈다.
◇고교 무상교육·실업부조 도입…불어나는 지출=‘슈퍼 예산’으로 짜인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9.5% 많은 469조6,000억원 규모다. 10.6%가 늘어난 지난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 증가율이었다. 정부가 지난해 오는 2022년까지의 중기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밝힌 내년도 총지출은 504조6,000억원 규모다. 일각에서는 무분별한 복지지출 확대 등의 영향으로 예산 규모가 당초 계획을 초과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분야별로 들여다보면 돈 쓸 곳투성이다. 특히 고용·복지 분야에 재원이 집중된다. 내년도 예산에 처음으로 편성되는 한국형 실업부조와 고교 무상교육이 대표적이다. 한국형 실업부조는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저소득 구직자에게 6개월간 월 50만원을 지급하는 사업이다. 대상 인원이 약 130만명으로 추산되는 만큼 소요 예산은 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내년 처음 편성되는 고교 무상교육 예산은 1조4,000억원으로 전망된다.
올해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을 촉발한 미세먼지 저감 예산도 내년에는 대폭 늘리기로 했다. 노후 경유차 폐차 지원과 친환경차 보급 확대는 물론 관련 연구개발(R&D) 지원과 중국과의 협력사업에도 예산이 대거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생활형 사회간접자본(SOC) 등 국가 인프라 확대와 재정 분권, 국가 균형발전 프로젝트에도 적지 않은 예산이 반영된다. 인공지능(AI), 수소산업 등 미래 신산업과 관련 인재 육성에도 예산이 투입된다. 안일환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은 “경제 활력을 불어넣고 소득 재분배를 강화하는 측면에서 재정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기재부 “국가채무 증가 속도 빨라질 가능성” 셀프 경고=문제는 나라 살림살이다. 지난해 정부가 1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예산을 늘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탄탄한 세수 예측이 있었다. 반도체 업황 호조에 따른 법인세수 증가 등 주요 세목이 정부의 적극적 재정 운용을 뒷받침했다. 정부 예상보다 국세가 25조4,000억원이나 더 걷혔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반도체 업황 부진과 부동산 시장 침체 등으로 세수 증가세가 예년만 못할 것이라는 게 정부 전망이다.
반면 ‘예산을 더 달라’는 부처 요구는 커지고 있다. 재정 건전성을 관리해야 하는 기재부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안 실장은 “올해 세수 여건은 지난해에 비해 둔화하는 반면 각 부처의 지출 요구는 굉장히 크다”면서 “재정 건전성 관리를 고민하면서 재정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수입은 주는데 돈 쓸 데는 많아진다는 토로다. 이 때문에 기재부가 지난해 예상한 올해 국가채무 740조8,000억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 39.4%도 의미 없는 숫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안 실장은 “세수 증가 둔화와 재정 수요 증가 등을 고려해 중장기 재정 건전성 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상황이 이렇자 기재부는 2년 만에 재량지출사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재량지출은 한 번 늘리면 줄이기 어려운 ‘경직성 예산’인 의무지출의 반대 개념이다. 정부 의지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성과가 부족하거나 예산이 배정됐는데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재량지출사업 중 10%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지난해를 기점으로 의무지출이 재량지출 규모를 넘어섰고 앞으로 격차는 더 커질 것으로 전망돼 ‘10% 구조조정’이 재정 건전성 악화를 얼마나 만회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올해 예산 기준 의무지출은 239조원으로 전체 지출의 51%를 자치한다. 황성현 인천대 교수(한국재정학회장)는 “중장기적으로 세입 기반 확대 노력 없이 확장 재정만 펼친다면 재정 건전성 악화가 만성화할 수 있다”면서 “현 정부가 재정 건전성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세종=황정원·한재영기자 garde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