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희(56) 여자프로배구 흥국생명 감독은 감독으로도 화려한 경력을 써내려가고 있지만 선수 시절이 더 눈부셨다. 배구 올드팬들은 박미희라는 이름만큼 ‘코트의 여우’라는 별명을 떠올린다.
그는 지난 1981년에 멕시코 세계청소년선수권 우승 멤버로 활약하면서 18세에 이미 체육훈장(기린장)을 받았다.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한국 여자배구 선수 최초로 개인상(수비상)을 받기도 했다. 역대 올림픽 여자배구에서 개인상을 받은 선수는 박미희와 2012 런던 올림픽 득점왕의 김연경뿐이다.
‘코트의 여우’라는 별명을 언급하자 박 감독은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174㎝는 센터 포지션으로서 작은 편에 속하거나 어중간한 키였다. 키로도 힘으로도 안 되니 꾀라도 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그나마 발달한 것 같다”며 웃었다. 이를테면 부족함이 새로운 강점을 이끌어낸 셈이다. 덕분에 세터로도 활약했고 선수 시절의 다양한 경험은 지도자 생활에도 좋은 밑바탕이 됐다.
코치 생활을 하지 않은 것도 역설적으로 코치진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고 있다. 1991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한 박 감독은 TV 해설위원을 거쳐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코치 경험이 없다는 게 저한테 가장 큰 벽”이라고 털어놓았다. 박 감독은 “코치진의 눈에는 보이지만 제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이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든다”며 “그럴 때는 그냥 한계를 받아들이고 코치진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방법”이라고 했다. 챔피언결정전에 앞서 박 감독과 코치진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흔들리면 선수들이 흔들린다. 전전긍긍하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자”고 뜻을 모았다. 선수들은 가장 긴장될 무대에서 오히려 “재밌다”며 챔프전을 즐겼다.
박 감독은 ‘공부하는 선수’로도 유명했다. 실업 시절 대학에 진학한 최초의 여자 배구선수였다. 박 감독은 “일찍이 배구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어릴 때는 여기저기 몸이 많이 아픈 아이였다. 선수생활을 오래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아버지가 늘 공부를 강조하셨고 스물여섯살에 뒤늦게 대학에 갔다”고 돌아봤다. 같은 팀 선배들의 눈치를 보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끝내 학사모를 썼다. 은퇴 후에는 임신 중에도 공부를 계속해 체육학 석사까지 땄다. 그는 “우리 팀 선수들에게도 틈만 나면 공부하라고 옆구리를 찌른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사이버대학도 있고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며 “선수 생활보다 그 이후의 삶이 훨씬 길다. 다음 삶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오승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