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잘생긴 남자만 만났어요. 어쩌다 못생긴 남자를 만나 배신까지 당하니 너무 속상해요.”
자정을 앞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소재의 한 주점 앞. 112신고를 받고 출동한 도곡지구대 김유리 순경에게 하소연하던 A(27)씨가 급기야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남자친구 B(35)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B씨가 퇴폐 마사지 업소를 간 사실을 알게 된 A씨가 B씨의 뺨을 때리자 화가 난 B씨 역시 A씨를 때려 신고가 접수된 것이다. 둘은 서로를 고소하겠다고 외치기도 했다. 아나운서라고 주장하는 A씨는 “언론인으로서 위험을 감수하고 고소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이 한참을 위로한 끝에 둘은 고소 의사를 접고 귀가했다. 고생했다는 기자의 말에 김 순경은 “매일 밤 있는 일”이라며 웃어 보였다.
시민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지구대. 밤이 깊어 갈수록 취객은 많아지고 신고전화 벨 소리도 잦아진다. 서울에서도 특히 사건 사고가 많은 도곡·홍익·화곡지구대 경찰들의 ‘아수라장 같은 밤’을 서울경제신문 취재진이 동행 취재했다.
◇‘유흥 불야성’ 도곡지구대=“505만원 못 내” 새벽 3시께 서울 강남구 역삼2동에 위치한 한 유흥주점. 신고가 접수된 ‘룸’ 안으로 들어서자 거나하게 취한 중년 남성 2명과 정장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점 직원이 실랑이 중이었다. 경찰이 들어서자 한 중년 남성은 대뜸 “아가씨를 부른다고 505만원이나 썼는데 아가씨가 술에 취해 엉뚱한 방에 들어갔다”고 하소연했다. 술값 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이동재 경위는 “민사 사건이라 저희가 처리해드리기 어렵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또 다른 중년 남성은 “어쭈 어디 한 번 그냥 가봐”라며 “내가 이곳을 다 뒤엎어버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을 한참이나 어르고 달래다가 겨우 주점을 빠져나온 이 경위는 “흔히 있는 일”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바쁠 때는 하룻밤에 술값 시비가 5~6건에 달한다”며 “그럴 때는 몸이 녹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도곡지구대는 강남역 인근 유흥가를 관할한다. 이 때문에 유흥주점이나 불법 성매매 업소 등에서 들어오는 신고도 끊이지 않는다.
◇‘3부로 나뉘는’ 홍익지구대=“홍익지구대의 밤은 3부작입니다. 초저녁에 민원업무가 주를 이루는 1부가 지나가면 늦저녁부터 주취자가 나타나며 2부가 시작합니다. 만취자가 등장하는 새벽녘은 3부입니다.” 박정민 순경이 말하는 홍익지구대다. ‘업무 강도가 높다’는 소문처럼 홍익지구대에는 밤새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 ‘수갑데이’인가. 너무 힘든데.” 새벽 1시48분께 만취해 술집 종업원을 폭행한 김모(32)씨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수갑이 채워진 채 지구대로 들어섰다. 만취 상태인 권모(36)씨에게 수갑을 채워 지구대로 연행한 지 고작 18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편의점을 방문한 권씨는 직원이 휴대폰 충전이 안된다고 하자 바닥에 드러누워 행패를 부렸다. 이윽고 지구대 안은 권씨와 김씨의 폭언과 욕설로 가득 찼다. 애초 경찰에게 욕설을 퍼붓던 이들은 이윽고 시끄럽다며 서로 욕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1시간가량이 지나서야 고성은 잦아들었다. 말로만 듣던 홍익지구대의 3부였다.
젊은 층이 몰리는 유흥가를 관할하는 만큼 홍익지구대에는 성범죄 신고도 자주 접수된다. 새벽 5시25분께 홍대 상상마당 근처에서 술에 취한 커플의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이 도착하자 여자친구인 박모(20)씨는 남자친구 김모(25)씨가 “낙태 종용은 물론 데이트폭력을 일삼고 성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해 협박했다”며 고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남자친구 김씨는 “낙태는 합의하에 이뤄졌고 여자친구가 빌린 돈 200만원을 갚지 않아 맞고소하겠다”고 받아쳤다. 쌍방고소하기로 한 이들은 곧장 마포서로 인계됐다.
◇‘생활밀착형’ 화곡지구대=“우리 관할은 유흥가와 주거지가 공존하지만 소득 수준이 낮은 편이라 무전취식과 고독사 등 서민 삶과 밀접한 신고가 주로 접수됩니다.” 조영욱 지구대장은 화곡지구대를 ‘생활밀착형 지구대’라고 설명했다.
화곡지구대에는 주취 신고가 잦다. 기자가 찾은 이날도 오후11시40분께 여성이 위협받는다는 신고가 접수돼 현장에 나갔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20대 여성 D씨는 경찰이 오자 “술은 취했는데 택시도 안 잡혀 홧김에 빨리 와달라고 신고했다”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결국 D씨는 순찰차를 타고 귀가했다. 이튿날 새벽 1시45분에는 자살위험 신고가 접수됐다. 술에 취한 최모(60)씨가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는 동생에게 전화해 “죽겠다”고 말한 뒤 연락이 끊긴 것이다. 경찰은 즉시 휴대폰 위치추적을 통해 최씨가 화곡동 일대 먹자골목에 위치한 것을 확인했다. 현장을 1시간가량 헤맨 끝에 먹자골목 일대를 배회하는 최씨를 발견했다. 지구대로 옮겨진 최씨를 경찰들은 “살아있는 게 고마우니 나쁜 생각 마시라”며 설득했다. 최씨는 새벽 2시30분께 동생과 함께 지구대를 나섰다.
일선 지구대 경찰에게 요즘 화두는 ‘보디캠’이다. 민원인의 민사소송이 잦아지는 만큼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그러나 이마저도 정부 보급품은 수량도, 품질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구대 경찰들은 10만원가량의 사비를 들여 보디캠을 직접 구입해 착용하는 실정이다. 조 지구대장은 “경찰은 법 집행을 하다 보면 물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며 “가해자와 있을 혹시 모를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보디캠을 착용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서종갑·이희조·한민구·방진혁기자 gap@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