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917년 7월5일 중국 베이징에서 항공기 2대가 자금성 위로 폭탄을 떨어뜨렸다. 폭탄은 자금성 내 ‘어화원’ 연못을 부수고 ‘융복문’ 지붕을 날려버렸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공중폭격에 중국은 물론 전 세계도 깜짝 놀랐다. 자금성을 폭격한 것은 다름 아닌 중국군이었다. 1912년 청조가 무너지고 공화제로 바뀐 지 5년 만에 장쉰이라는 군벌이 이끈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고 청 제국 부활을 선언하자 공화국 군대가 자금성 공격에 나선 것이다. 공중폭격까지 동원한 공화국의 반격에 복벽 소동은 12일 만에 끝났다.
#2. 3월11일 중국 민항총국은 안전 위험을 이유로 자국 내 항공사들에 보잉 737맥스 기종의 운행을 중단하도록 요구했다. 전날 같은 기종의 에티오피아항공 여객기 추락으로 시스템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미국 등 다른 국가의 조치가 나오기도 전에 중국이 선제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아시아와 유럽·남미 주요 국가들이 중국 뒤를 따르자 미국도 결국 이 기종의 운항을 금지했다. 글로벌 항공시장에서 중국이 주도권을 과시한 셈이다.
고속철도·항공모함·달착륙우주선 등을 속속 개발해낸 중국이 이제 여객기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여객기는 첨단기술에 고도의 안정성까지 유지해야 해 ‘궁극의 기술’로 불린다. 지금까지는 미국 보잉사와 유럽 에어버스가 글로벌 시장을 양분했지만 보잉이 잇단 추락사고로 휘청이는 틈을 타 중국이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다. 글로벌 여객기 시장의 ‘태풍의 눈’은 오는 2021년께 시장에 나올 중국산 여객기 ‘C919’다. 개혁개방 이후 40여년간 축적해온 자체 기술에 ‘기술과 시장을 교환’하는 정책에 따라 도입한 해외 기술을 합친 중국이 항공시장에 새 강자의 부상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 항공기산업은 100여년의 역사를 가진다. 청조 말 군사력 강화를 위해 해외에서 항공기 몇 대를 수입한 후 1911년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수립, 이어 진행된 내전으로 각지의 군벌들은 너도나도 항공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17년 자금성을 폭격한 항공기는 프랑스에서 사온 것이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중국 항공기 산업이 일변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1932년 상하이사변에서 일본군의 맹폭을 받은 중국은 본격적인 항공기 산업의 필요성에 눈뜨게 됐다. 이듬해인 1933년, 저장성 항저우에는 미국과 합작한 중국 최초의 항공기제조공장인 중앙비행기제조창이 세워졌다. 1937년까지는 상하이와 난창·광저우 등에도 비행기공장과 수리공장 등이 설립됐고 해외 라이선스를 통한 항공기 제작이 이뤄졌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300여대가 생산됐다고 한다. 하지만 중일전쟁 패배로 영토의 태반이 일본에 점령되면서 항공기 산업도 침체기에 들어갔다.
일본 패퇴 이후 국공내전을 거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공기 기술 도입선이 180도 바뀌었다. 기존의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회주의 동맹국인 소련이 대상이 된 것이다. 다만 중국 내에도 전쟁 전에 보유한 자체기술과 인력은 남아 있었다. 중국이 1950년대 이후 소련제 군용기 기술을 대거 도입하면서 재빨리 적응한 이유다. 이후 안보상 필요한 군용기 제작은 신속히 진행됐다. 초기 옛소련제 미그전투기 짝퉁에서 시작해 최근에는 미국의 최신예 F-35에 맞선다는 평가를 받는 젠(殲·J)-20 스텔스전투기까지 실전 배치한 상태다.
여객기 개발은 군용기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안전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 때문이다. 중국이 여객기 개발로 눈을 돌린 것은 아이러니하게 문화대혁명 도중이었다. 마오쩌둥이 1970년 상하이 시찰 때 지시한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상하이는 공업기초가 탄탄하니 비행기를 제작하라”는 마오의 지시로 윈(運·Y)-10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다만 여객기를 개발하기에는 예산이나 기술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100인승급의 윈-10 개발 사업은 1980년 첫 시험비행에 성공했지만 양산에 이르지 못하고 1986년 미완으로 종결됐다.
이후로도 여객기 제작을 위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1979년 미국과 수교한 중국은 1985년 미국 맥도널더글러스와 합작해 MD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하지만 일부 시험비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1996년 보잉이 맥도널더글러스를 인수합병(M&A)하면서 이 역시 미완으로 끝났다. 비슷한 시기 에어버스와의 공동개발도 추진됐지만 1998년 무산됐다.
여객기 제작에 대한 꿈이 다시 살아난 것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 시기였던 2002년에 중형여객기 ARJ21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다. 2006년에는 대형여객기 국산화를 국가 중장기과학기술발전계획 16개 중대 프로젝트 중 하나로 선정했으며 2007년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는 일단 중대형여객기 프로젝트추진팀을 결성하기로 했다.
이후 중국의 여객기 개발에서는 2008년 기존 항공사들을 통합해 설립한 중국상용항공기책임유한공사(COMAC·코맥)가 핵심 역할을 하게 된다. 항공산업은 첨단 제조업 육성을 위해 중국 정부가 계획한 ‘중국제조 2025’ 10대 분야에도 당연히 포함돼 있다. 코맥의 첫 작품인 ARJ21은 70~110석 규모의 중형항공기로 2008년 첫 비행 성공 이후 2016년부터 중국 내 노선에서 상업비행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C919다. 보잉 B737과 에어버스 A320의 경쟁상대가 될 이 기종의 이름에서 C는 중국(China)의 첫 글자, 9는 오래간다는 구(久)와 발음이 같다는 의미에서 붙었으며 뒤의 19는 좌석 수 190이다.
항공기 제작의 어려움을 입증하듯 그동안의 C919 개발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중대형항공기 제작을 목표로 C919 연구가 시작된 것은 2007년의 일이다. 이후 첫 번째 C919 여객기 기체가 선보인 것은 2015년, 첫 비행에 나선 것은 2017년이다. 연구 시작에서 첫 비행까지 딱 10년이 걸렸다. 자금성 폭격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진 지 100년 만에 중국산 중대형여객기가 하늘을 날게 된 것이다.
여전히 난제는 많다. 2014년 시험비행, 2016년 항공사 인도라는 목표 일정은 계속 늦어지고 있다. 항공업계에서는 현재 속도라면 2021년이 돼서야 실제 인도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기술적 문제도 여전하다. 명색은 ‘메이드 인 차이나(중국제조)’지만 엔진 등 핵심부품은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C919의 성공에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시장성 때문이다. C919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800여대의 선주문을 받은 상태다. 발주처는 중국동방항공·중국남방항공 등 대부분 중국 항공사들인데 이들은 현재 A320이나 B737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달 발생한 경쟁 기종 B737 맥스의 사고가 C919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그래서 나온다. 사고 전에 전 세계에서 운항됐던 B737 맥스의 25%는 중국에 있었다. 중국이 B737 맥스 운항금지를 선제적으로 단행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중국 항공기 시장은 이미 항공기 제조사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정도다. 지난해 9월 보잉은 시장 전망에서 중국 항공사들이 앞으로 20년간 항공기 7,690대를 사들일 것으로 전망했다. 금액으로는 1조1,190억달러(약 1,350조원)에 달한다. 미중 무역협상 타결을 위한 협상안에도 보잉 항공기 추가 구매가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말 프랑스를 방문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350억달러어치에 해당하는 에어버스 300대를 구매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중국이 필요한 수요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즉 코맥이 C919를 잘 만들기만 하면 중국 내 수요만으로도 충분히 경제성이 있는 셈이다. C919가 첫 시험비행에 성공한 2017년 중국은 290인승 대형항공기 C929 개발에도 새롭게 착수했다. 중국은 지금도 10년 앞을 내다보고 있다.
중국 내수와 함께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 참여국도 중국산 항공기의 수요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인프라 구축의 대가로 해당국에 중국산 항공기 구매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나 프랑스산 여객기에 비해 훨씬 저렴한 중국 제품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저개발국들도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가나에 본사를 둔 아프리카월드에어라인은 최근 ARJ21 2대를 주문했다. 이는 코맥의 첫 해외 수출로 평가된다.
중국은 한때 한국과도 항공기 합작을 추진했었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 장쩌민 전 주석과 2000년까지 100인승 여객기를 한중이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의 항공산업 수준이 엇비슷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합작은 제조공장의 위치와 지분 등에 대한 갈등으로 2년 만에 무산됐다. 항공 업계 관계자는 “당시 한국은 여객기 개발을 포기했지만 중국은 그 길을 고집한 결과 지금처럼 격차가 벌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베이징특파원 chs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