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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칼을 찬 원숭이

1930년 런던해군조약

런던 군축조약에 참가한 미국 대표단 /사진=위키피디아런던 군축조약에 참가한 미국 대표단 /사진=위키피디아



1930년 4월22일 미국과 영국·일본이 조약을 맺었다. 순양함 등의 비율을 평균 10대10대7로 정한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런던 해군군축조약. 3개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회담에 참가했으나 견해차가 커 빠졌다. 5대 해군국으로 불리던 이들이 군축에 나선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째, 허점투성이인 1922년 워싱턴 해군조약을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보다 절실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세계 대공황으로 국방예산 감액 요구가 드세졌다.


8년 전 워싱턴 해군조약의 골자는 5대3대1.67이라는 전함의 보유비율 확정. 미국과 영국(5)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일본(3)과 프랑스·이탈리아(1.67) 순으로 나눴다. 회담 결과에 일본은 들썩거렸다. 세계 3대 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은 셈이지만 만족하지 않았다. 군부는 더했다. ‘미국에 비해 70%의 전력을 갖는다’는 ‘대미 7할’ 밑이라는 분노 속에서 속임수로 함정을 건조해나갔다. 당사국들의 꼼수 경쟁 때문에 등장한 것이 런던 조약. 각국은 순양함과 구축함, 1만톤 이하 항공모함의 신규 건조에도 제한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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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번에도 시끄러웠다. 미국·영국·일본의 정확한 비율은 10대10대6.975. 대미 7할에 근접했지만 일본 군부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일본 해군은 국제대화를 하는 가운데 힘을 기르자는 조약파와 미국·영국에 견줄 수 있는 전함 건조에 매진해야 한다는 함대파로 갈려 싸웠다. 내부 갈등의 정점은 1932년 5·15사건과 1936년 2·26사건. 청년장교들이 조약을 주도한 정부 고관들을 백주대로에서 처단한 뒤 일본은 군사적 국가자본주의를 향해 달렸다. 일말의 가능성을 보였던 민주주의는 일본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과연 워싱턴·런던 해군조약에서 발목을 잡혔을까. 정반대다. 최대 수혜를 입었다. 거함거포 만능주의 아래 온 힘을 쏟아부었던 전함 건조에서는 대미 6할을 간신히 채웠으나 보조함은 5할도 신규 건조하지 못했다. 재정의 40%를 투입하면서도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국력이 못 미친 탓이다. 청일전쟁 이후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까지 10년 주기로 전쟁을 치를 때마다 승리하고 짭짤한 경제적 이득까지 챙겼던 경험으로 무조건 전쟁에 매달렸던 끝은 익히 아는 대로다. 패전. 2차 세계대전에서 15만명 이상의 미군과 470만명의 중국인을 죽인 일본이 다시 달리고 있다.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향해. 바탕이 폭력적인데다 칼까지 찬 원숭이는 위험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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