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지난 1919년 가난한 조부모 밑에서 10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는 가정 형편 때문에 아버지의 소학교 입학을 흔쾌히 허락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바쁜 농사일에 불려다니며 가까스로 졸업했다. 결혼 후 못 다한 배움의 한을 풀고자 일본·만주로 건너가 공부와 생계를 꾸렸다. 이런 아버지에게 행복이란 곧 배움이었다. 늦게 본 아들의 이름을 ‘창학(昌學)’으로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6·25전쟁 등 눈물겨운 세월 속에서도 아버지는 7남매를 키웠다. 1980년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나 역시 아버지를 떠올리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수여식 날 살아 계셨다면 환한 미소로 축하해줬을 아버지 생각에 울컥했다.
부모가 돼서야 부모의 마음을 깨닫기도 한다. 얼마 전 군대 간 둘째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제대를 앞두고 진로에 관한 고민이 많아 보였다. 자식을 둔 부모는 어디에서나 큰소리를 치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들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이 뻐근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자식들에게 시험점수 잘 받아오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다. 대신 쉼 없이 배울 것을, 책을 놓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수험공부로 보내는 아이들에게 나의 잔소리는 결코 반가운 벗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읽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정직한 이해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오래전 읽었던 중국 작가 위화가 쓴 ‘허삼관매혈기’라는 책이 생각이 난다.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거센 파도 속에서 피를 팔아가며 가족을 지킨 아버지 허삼관의 이야기이자 동시대를 살았던 부모님들의 이야기다. 큰아들은 알고 보니 다른 남자의 자식이고 사고를 쳐 막대한 합의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다. 그래도 허삼관은 피를 팔아 합의금을 물고 처자식에게 국수를 먹이며 큰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한다. 시대적 아픔을 담으면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는 이 작품은 ‘살아간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묵연한 달관의 경지로 이끌어준다.
꽃피던 봄날을 지나 신록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걷고 있는 이 길의 주인은 누구일까 고민했다. 진짜 주인은 나의 부모, 나의 자식들일 수 있겠다 싶어서다. 나의 부모가 고단하게 걸으셨을, 자식들이 걸어가야 할 끝없는 인생길을 생각한다. 꽃길만은 아니었을, 그러나 꽃길보다 더 아름다울 그 길을 말이다. 오늘따라 시골집 문틀에 적혀 있던 글귀가 생각이 난다. ‘당상부모천년수(堂上父母千年壽) 슬하자손만세영(膝下子孫萬歲榮).’ 부모님은 오래 살아계시기를 바라고 자손들은 오래 영화를 누리기 바란다는 뜻이다. ‘효’라는 것이 무색해진 요즘 우리 사회가 곱씹으면 좋을 글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