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통일·외교·안보

[뒷북정치] 3차 고난의 행군 예고 北...비핵화 협상 '쌀'의 역사

비건 8일 방한, 韓 정부와 北 식량지원 논의관측

北, 최악의 식량난...북 매체 '곡물 확보'주민독려

2012년 식량지원 계기 북미 '2.29합의' 재현주목

구체적 비핵화 합의 없는 식량지원 한계 뚜렷

지난해 7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추석을 앞두고 민생경제 관련 활동을 벌였다./연합뉴스지난해 7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추석을 앞두고 민생경제 관련 활동을 벌였다./연합뉴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을 통해 경제난을 극복하려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구상이 하노이 노딜로 좌절되면서 북한이 3차 고난의 행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김 위원장의 자력갱생 강조도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과 자연재해로 인한 심각한 식량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놓은 정치선전 구호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민들에 대한 고통만을 강조하면서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만큼 김 위원장은 국제사회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외교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집권 후 경제발전과 인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강조한 김 위원장은 2012년 집권 초기 미국의 대규모 식량 지원을 약속받고 비핵화 조치에 나서겠다는 합의를 미국과 한 경험도 있습니다. 사실상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하노이 노딜에 대한 여론이 최근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점도 북미 대화 재개에는 긍정적입니다. 결혼식장까지 갔다가 혼인서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나온 만큼 이들이 다시 만나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합니다.

지난 2012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의 밀가루 트럭이 출경준비하고 있다./파주=연합뉴스지난 2012년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의 밀가루 트럭이 출경준비하고 있다./파주=연합뉴스


◇北 10년來 최악의 식량난


한미가 식량지원을 유인책으로 북한을 다시 협상장으로 끌어오려는 건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 때문입니다. 실제 북한의 식량난은 심각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이 지난달 30일 발간한 ‘북한: 가뭄과 식량 불안’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2018년 495만t으로 지난 10년간 최저치를 기록했고, 북한 인구의 41%인 1,03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로 확인됐습니다.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자존감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북한이 유엔 세계식량계획(WFP)과 식량농업기구(FA0)의 방북을 허용했을 정도니까요. WFP는 지난 3월부터 북한 식량안보 실태에 대한 긴급 평가에 착수했고 이달 중 평가결과를 공개할 계획인데 전문가들은 10년 내 최악의 식량난이라는 결과가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전날 ‘새 땅을 대대적으로 찾아 경지면적을 늘리자’ 제목의 사설에서 “새 땅 찾기 사업은 단순히 실무적 사업이 아니라 적대세력들의 악랄한 책동을 짓부수고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전진하는 사회주의 조선의 본때를 보여주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 같은 북한의 열악한 사정을 반영합니다.



신문은 “경지면적을 늘리는데 알곡 증산의 예비가 있고 인민들의 식량문제, 먹는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있다”며 “풍년 낟가리를 높이 쌓아야 자력자강의 승전포성이 울릴 수 있다.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땅이라면 모조리 찾아내야 한다”고 인민들을 독려했습니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비건’ ‘볼턴’ 연이어 韓 찾는 트럼프 북핵팀

하노이 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해 한미가 대북지원 카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8일 한국을 찾는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한미 워킹그룹 회의를 통해 북한의 식량 지원 문제를 우리 정부와 심도있게 논의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습니다.

북한의 식량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도주의적 식량 지원’을 북미가 대화 재개의 계기로 삼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 북미는 과거 식량 지원을 약속하고 비핵화 합의를 이끌어 낸 전례가 있습니다. 2012년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계획이 알려지면서 장거리 미사일 문제가 불거지자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대규모 식량 지원을 토대로 북한과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북미는 세 차례 고위급회담을 거쳐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유예,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포함한 영변 핵시설 활동 중지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에 따른 24만톤의 식량을 내용으로 하는 ‘2.29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지만 유엔안보리가 1874호 대북제재 결의안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의장 성명을 발표하자 북한은 즉각 2.29 합의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사실 2.29 합의는 북미 간 비핵화에 대한 정의가 일치되지 않은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불완전한 합의였습니다. 실제 북한은 2.29 합의 이후 북미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논의를 강조한 반면 미국은 북한의 위성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 외교가에서는 오바마 행정부가 대선을 치를 때까지 북한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협상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재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무력시위 도발을 예고하는 북한의 행보가 마치 그때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정책을 펴고 있는 만큼 북한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2010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북한 수해지역에 지원하는 분유 2,000통과 밀가루 100t, 쌀 10t을 실은 트럭들이 27일 오전 파주 임진각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파주=연합뉴스지난 2010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북한 수해지역에 지원하는 분유 2,000통과 밀가루 100t, 쌀 10t을 실은 트럭들이 27일 오전 파주 임진각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파주=연합뉴스


우리 정부도 1995~2010년 9차례에 걸쳐 265만 5,000톤의 쌀을 북한에 지원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180만톤으로 가장 많은 지원을 했고 뒤를 이어 김대중 정부(70만톤), 김영삼 정부(15만톤), 이명박 정부 (5000톤) 순이었습니다. 정부의 쌀 지원이 경제협력 등 남북관계 개선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요동치면서 식량 지원에 따른 남북관계 개선은 ‘퍼주기 논란’을 겪으며 비판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이처럼 대북 식량 지원이 대화를 위한 협상의 모멘텀은 될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명확한 비핵화 합의가 연계되지 않는 한 북핵 문제는 또 다시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박우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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