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 줄 아는 것보다, 돈이 많은 낭군님이 좋아요.”
이게 무슨 말인가. 요즘 인기 많다는 한 모바일 게임에서 손수 키운 딸이 기자에게 건넨 대사다. 겨우 몇 시간 전 만난 딸이지만 난 너를 그리 키우지 않았다. 현실의 딸이 자라서 저런 말을 한다면 머리가 아팠을 터, 잠시 멈칫 한 게 전부였다. 생각할 틈이 없다. 한 나라의 황제가 된 나는 더 많은 ‘후궁’을 얻기 위해 쉬지 않고 돌아다녀야 했다.
기자는 최근 한 모바일 게임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 스마트폰에 게임을 설치했다. 중국 청나라 시대 궁궐로 타임슬립한 기자는 아버지 황제의 죽음을 목도한 뒤 순식간에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드디어 게임 시작이다. 구성은 간단했다. 손가락 끝 움직임 몇 번만으로 온 고을의 세금과 곡식을 징수했다. 때가 되면 과거시험을 열어 인재를 뽑았다. 군대를 몰아 전투에 승리할 때마다 보상이 주어졌고 국력도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곧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후궁’을 맞이하는 것이다.
■돈 주고 여성을 사는 행위를 유도하는 ‘황제 게임’
권력의 정점인 황제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는 한 인기 모바일 게임을 두고 ‘여혐(여성혐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게임의 이름은 ‘황제라 O하라’. 이 게임은 모바일 인덱스에 따르면 하루 5,000만 원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다. 중국 C 게임제작사가 만든 이 황제 게임은 지난해 9월 출시 이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구글 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 등에서 게임앱 유료매출 순위 ‘10위권’을 수시로 오르내린다.
일단 광고부터 문제다. 구글 플레이 내 게임 리뷰 란에는 광고 내용을 비판하는 글들로 가득하다. 한 이용자는 “외모평가와 치정싸움, 성관계 묘사까지 나오는 광고가 너무 역겹다”며 분노했다. 다른 이용자도 “낙태약을 마시게 해 후궁의 아이를 죽게 만든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고 충격받았다”면서 “이게 전체이용가 게임 광고에서 할 얘기인가, 당장 삭제하라”고 글을 남겼다. ‘만 3세 이상 전연령가’ 게임치고는 광고 내용이 선정적, 폭력적이란 비판이다.
C 게임사의 상담직원은 저질 광고 논란에 대해 “불편하다는 광고 내용에 대해서는 담당 직원에게 모두 전달하고 있다, 우리도 고민이 많다, 해당 광고는 꼭 수정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비슷한 문제가 계속 반복돼 온 탓에 논란을 키우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 플레이 동안에는 문제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게임을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는 ‘후궁’을 많이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녀’ 들은 궁궐 밖 길을 다니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일종의 ‘헌팅’이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미녀’ 들은 플레이어를 향해 하트가 쏟아지는 미소와 눈빛을 쏴댔다. 대부분 얼굴을 붉히고 고개는 숙이고 있다. 이들과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고 나면 비로소 미녀를 후궁으로 들일 수 있다.
만남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이를 앞당기려면 아이템이 절실하다. 이때 ‘현질(아이템을 돈 주고 구매하는 것)’의 유혹이 시작된다. 돈을 들일수록 손쉽게 ‘미녀’를 얻는 구조다. 마음에 드는 미녀를 골라 만나려면 돈을 더 써야 한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지닌 미녀 순위를 보여주는 ‘미녀 랭킹’도 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간택에 의해 후궁이 되는 ‘미녀’들은 게임에서 중추 역할을 맡는다. 황제는 후궁을 들인 뒤 ‘총애’를 통해 친밀감을 쌓아 자식을 낳는다. 그 자식을 키워 연맹국 자제와 혼인을 시키면 국력이 세진다. 결국 후궁이 많은 플레이어가 게임 순위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할 확률도 높아지는 셈이다. 겉으로는 SRPG(Strategy·Simulation Role-Playing Game,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형태이지만 그 속은 여성을 사들이고 길들이는 행위가 핵심이다.
■ 많은 비판에도 인기 폭발…일일 매출 1억 원 육박
권력을 지닌 플레이어가 여성을 수시로 취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권력형 SRPG 게임의 선구자, 아니 ‘성’구자는 따로 있다. 1년 전 국내 출시된 ‘왕이 되는 O’다. 역시 중국 제작사가 만든 이 게임은 여성 캐릭터를 두고 지나친 성적 대상화를 묘사한 광고로 눈총을 샀다. 논란이 일자 게임물관리위원회는 해당 광고들을 차단 시키고 ‘12세 이용가’ 등급을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으로 직권 재분류했다.
그러나 이 게임은 논란 중심에 서며 비판과 인기를 동시에 가져갔다. 전형적인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구글 플레이에서만 50만 명 이상이 게임을 다운 받았다. 원조 게임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된다. 5일 게임앱 유료매출 순위 기준 애플 앱스토어에서 8위, 구글 플레이에서 14위에 올라 있다.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수십, 수백만 원씩 과금했다 환불 방법을 묻는 플레이어들의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모바일 인덱스에 따르면 ‘왕이 되는 O’는 일일 매출이 1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류작들도 우후죽순 쏟아졌다. 일부는 더 자극적인 묘사로 이어졌다. ‘왕이 되는 O’의 현대판 재해석 버전인 ‘상O사회’가 대표적이다. 역시 중국 제작사가 만든 이 게임은 대기업의 회장이 돼 기업을 꾸려나가는 내용이지만 메인 이벤트는 ‘미녀’와의 교제와 데이트다. 게임 플레이 화면에는 플레이어와 교제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 명의 여성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놓고 선정적인 모습의 여성 캐릭터와 성행위를 은유하는 대사를 뿌리는 이 게임은 출시 한 달 만에 50만 다운로드 수를 달성했다.
■ 돈을 쓰게 만드는 ‘가챠시스템’…“국내 게임까지 인식 변질시켜”
국내 중견 게임개발사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로 일하는 황 모 씨는 “‘왕 게임’ 류는 업계에서도 말이 많다”며 “돈만 밝히는 저런 게임들 때문에 다른 게임들까지 덩달아 인식이 나빠졌다”고 씁쓸해했다.
여성 캐릭터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황 씨는 “게임은 판타지 세계를 그리다 보니 여성 캐릭터가 다소 현실적이지 않은 과장된 모습으로 묘사된다”면서 “결국 남성들이 선호하는 여성 이상형이 게임에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왕 게임’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특히 여성을 상품화해 가챠시스템(랜덤으로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얻는 게임 과금 방식)으로 돌리는 방식은 현금 지출을 과도하게 유도해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 그나마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과거 여성 캐릭터를 거의 벗고 있다시피 묘사했다면 지금은 각 캐릭터의 직업군에 맞는 보통의 옷을 걸치고 있도록 달라지고 있다. 그는 “게임 제작자들도 캐릭터 디자인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검열을 많이 하는 만큼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왕 게임 같이) 더러운 광고로 유명세를 얻어 규제도 받지 않고 하루 매출을 억 단위로 가져가는 것을 보면 허탈하다”고 덧붙였다.
■ “당신은 혹시 프로불편러?” vs “여성에 대한 그릇된 묘사 자체가 잘못”
한편 남성 중심의 게임 소비자층에 여성들이 많이 유입되고 ‘미투(me too)’와 같은 사회적 움직임까지 더해지면서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달라지고 있다. 게임 속 ‘여혐’ 요소들을 비판하고 공론화하는 움직임이 늘어난 것이다.
지난 2016년 블리자드의 1인칭 슈팅게임 오버워치 속 여성 캐릭터 ‘트레이서’는 전투 승리 시 뒤돌아서서 엉덩이를 강조하는 포즈로 논란이 됐다. 비판이 일자 개발자는 “누군가가 게임을 하며 불편하면 안 된다”며 해당 포즈를 교체했다. 같은 해 출시됐던 ‘서든어택2(넥슨GT)’ 역시 게임의 버그가 여성 성 상품화 논란으로 번져 결국 출시 100일도 못 넘기고 서비스를 종료했다. 4년 동안 300억 원을 쏟아부어 만든 대작 게임이었지만 비판에 꼬리를 내린 셈이다.
일본 닌텐도 사가 2013년 출시해 전 세계 1,200만 장이나 팔린 ‘튀어나와요 동물의 O’도 ‘여혐’ 논란에 휩싸였다. 게임 속 “여자는 여우, 늘 여자 조심해라”, “요즘 여자애들은”, “여자니까 당연히 피부 관리 해야지” 류의 대사와 일부 의상이 문제가 됐다. 올해 7년 만에 ‘동물의 O’ 후속작 출시가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일부 여성 이용자 중심으로 게임 내 여성혐오 표현 개선을 요구하는 공론화 운동이 진행 중이다. 이를 두고 일부 남성들은 “별걸 다 지적한다”, “프로불편러”라며 불편한 시선을 보낸다. 반대쪽에서는 “불편한 건 불편한 것”이라며 “시대가 바뀐 만큼 게임 속 여혐 요소가 바뀔 수 있도록 회사에 민원 넣고 메일 보내 ‘불편하다, 바꿔 달라’고 계속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젠더로 작품 읽기’ 매거진을 쓰는 박현우 칼럼니스트는 최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남성 대상 게임이라고 문제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여성을 성적으로 묘사하는 건 대상이 누가 됐건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칼럼니스트는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서 시장을 놀라게 하려는 예술가에 가까운 제작자들이 그런 게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장의 흐름에 묻어가려는 제작자들이 그런 게임들을 공장에서 만드는 식으로 찍어내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절대다수의 소비자들이 이런 게임들을 옹호하고 변호한다면 계속 이런 게임들이 나올 것”이라며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