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어촌에서 태어나 9세에 부친을 여읜 소년, 만지로. 성(姓)도 없고 배우지 못했으나 일본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집안의 생계를 위해 14세 때 고기잡이에 나섰다가 풍랑을 만나 고향에서 750㎞ 떨어진 무인도에 닿았다. 미국 포경선에 구조된 그는 하와이에서 내린 동료 4명과 달리 배를 계속 타기 원했다. 구출 2년 뒤인 1843년 5월7일 매사추세츠주 남부 뉴베드퍼드항에 내렸다.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일본 사람인 만지로는 윌리엄 휘트필드 선장의 양자로 지내며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영특했던 만지로는 돈을 모았다. 포경선 작살잡이로 시작해 부선장을 지내고 캘리포니아 금광에서 일해 1,000달러를 모아 배를 샀다. 돌아가기 위해서다. 하와이에 들러 옛 동료들을 싣고 오키나와에 돌아온 것이 스물네 살 때인 1851년. 외국인과의 접촉은 극형을 받던 시대였으나 이들은 2년간의 조사 끝에 ‘무죄’로 풀려났다. 처벌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받았다. 신분도 바뀌었다. 만지로를 불러들인 막부는 ‘하타모토(쇼군의 깃발을 지키는 무사)’에 임명하는 파격을 베풀었다.
일본이 그를 우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 각 분야에 반향을 일으켰으니까. 만지로를 조사한 심문관은 ‘효손키릿쿠(미국 표류기)’라는 책을 지어 거대한 증기 군함과 철도 등의 과학기술을 알렸다. 일본 근대를 개척한 풍운아 시바 료타로, 에도 무혈입성 담판의 주역인 가쓰 가이슈, 근대화의 이론가 후쿠자와 유키치, 미쓰비시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 등이 만지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일본의 조선 합병’을 지지한 데도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휘트필드 선장의 친구이며 공동 선주였던 할아버지에게 ‘부지런한 만지로’ 얘기를 들으며 성장한 소년이 루스벨트다.
만지로는 대학교수로 지내며 빈민구제에 힘쓰다 1898년 61세로 죽었다. 주목할 대목은 만지로 이전에도 세계와 접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582년 가톨릭 소년 사절 4명은 로마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오면서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들여왔다. 1613년 로마에 도달해 로마시민증과 작위를 받고 돌아온 중급 무사 출신인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네 번째 세계 일주 항해자로도 꼽힌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기 마련이다. 죽을 수도 있는 일본으로 돌아온 만지로의 귀향이 부럽다. 성적이 우수한 동양인 미국 유학생 가운데 귀국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