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4년 5월10일 오후2시 인천 월미도. 인천항 제2 갑문(사진) 준공식이 열렸다.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이어 인천의 내항으로 삼은 것이다. 아시아에서 최초, 세계에서 다섯 번째 규모였던 5만톤급 갑문은 준공 전부터 화젯거리였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설치된 제1 도크(1만톤급)보다 훨씬 컸다. 대형 선박들이 10m에 이르는 조수 간만의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인천항에 입출항하면서 경인공업지대도 활기차게 돌아갔다. 인천항의 연간 하역능력은 142만톤에서 627만톤으로 4.4배나 늘어났다.
동시 접안 가능 선박도 많아졌다. 당시 정부 발표에 따르면 과거에는 4,500톤급 3척을 비롯해 달랑 7척만 동시에 접안했으나 5만톤·4만톤·3만톤급 각 1척에 2만톤·1만톤급 각 3척, 8,000톤급 8척 등 대형 선박 18척을 포함해 25척이 동시에 배를 댈 수 있게 됐다. 화주들도 반겼다.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옮겨 항구에 짐을 푸는 이중하역에서 벗어나 돈과 시간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2 갑문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는 1935년 공사를 시작했으나 전쟁 때문에 곧 접었다. 계획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임하던 백상 장기영(서울경제·한국일보 창간인)의 주도 아래 되살아났다. 제1 갑문을 주로 미군이 사용해 경인 지역의 온전한 무역항 확보가 절실했다고 전해진다.
막상 1966년 4월 시작된 공사는 온갖 구설에 시달렸다. 당초 4년으로 잡은 공사 기간은 약 8년 보름이 걸렸다. 57억원으로 책정했던 공사비는 193억원이 들었다. ‘조기 완공과 예산 절감의 시대’에 이렇게 된 것은 설계와 사업 구조 변경 때문. 갑문을 2만톤급에서 5만톤급으로 늘린 설계 변경은 선견지명으로 볼 수 있지만 민간 자본에 특혜를 줬다는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준공 예정일이 계속 미뤄진 데는 부실시공 논란도 컸다. 부실 기초공사로 도크 내벽에 커다란 금이 발생했어도 정부는 시공회사에 부실 처리까지 맡겼다. 1979년 완공됐으나 1994년 무너진 성수대교도 이 회사가 건설한 다리다.
45회 생일을 맞은 인천항 제2 갑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존폐 양론이 맞선다. 갑문 통과에 시간이 많이 걸려 체선 기간이 늘어지는 경우가 많다. 초대형 선박의 내항 입항도 어렵다. 인천항은 진작부터 외항을 준설해 조수 간만과 관계없이 대형 선박을 접안시켜왔다. 갑문의 역할이 줄어들더라도 바라는 바가 있다. 인천항을 비롯한 우리나라 항구에 사람과 물품의 왕래가 넘치기를.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