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이지만 가난한 집안 태생인 소토가 돈을 모은 비결은 약탈. 부친이 원했던 변호사 수업을 포기하고 19세부터 남미 탐험대에 끼어 전공을 쌓아나갔다. 승마술이 뛰어났던 그는 프란시스코 피사로 원정대의 부사령관 겸 기병대장으로 잉카제국의 멸망(1533년)을 거들었다. 잉카의 황제에게 빼앗은 보물에 리마 부총독 등을 지내며 모은 황금으로 스페인 귀환 즈음(41세)에는 최고 부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이사벨라 여왕의 친척과 결혼해 가정까지 이뤘지만 그는 땅과 집을 팔았다. 다시금 탐험길에 오르기 위해서다.
플로리다에 내린 소토는 4년 4개월 동안 6,440㎞에 이르는 거리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소토 일행이 지난 지역은 오늘날 미국의 10개 주에 해당한다. 돌아가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황금과 젊음의 샘을 찾겠다던 소토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죽었다. 죽은 장소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부하들이 숨겼기 때문이다. 시신도 원한에 찬 원주민들이 훼손할까 두려워 강물에 수장시켰다. 무수한 인명을 죽인 소토는 의도하지 않은 죽음의 씨앗도 뿌렸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지리·생리학)의 명저 ‘총, 균, 쇠’에 따르면 ‘미국 동남부를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인 소토 일행이 가져온 병균은 원주민의 90% 이상을 몰살시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1만1,000여명을 학살해 부족을 없애버리기도 했던 소토는 북미 원주민에게는 원한의 대상이다. 백인들은 다르다. ‘에르난도 데 소토’라는 이름을 딴 축제며 건물이 즐비하다. 학교도 있다. 소토는 바비큐라는 음식도 문명세계에 알렸다. 원정대의 식용 겸 원주민 회유용으로 대규모 돼지떼를 이끌고 다녔던 소토 일행에게 원주민 부족이 알려준 조리방법이 스페인식 바비큐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소토와 그 부하들은 조리법을 알려준 부족마저 학살하고 말았지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