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경제원로 5인의 고언]"韓경제 앉은 자리서 말라가는 중…靑, 현실 직시하라"

"유아독존식 정책 고집 말고 성장 그랜드플랜 세워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경직된 주52시간 수정을

규제 개혁 등 통해 기업 둘러싼 환경 완화해줘야

대결구도 노사관계 안바꾸면 기업들 다 떠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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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경제가 앉은 자리에서 말라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위기의 실상입니다. 청와대가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

“지금 글로벌 경제는 단순히 미중 간 통상마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이 헤게모니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밖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한국은 꽉 막혀 있습니다.” (현정택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한국 경제가 안갯속에 있다. 성장률은 뒷걸음질치고 있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일각에서는 ‘L자형’ 경기침체 국면에 들어섰다는 암울한 분석을 내놓는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현인(賢人)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서울경제는 한국 경제를 움직였던 5명의 경제 원로에게 해법을 물었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진념 전 경제부총리, 현정택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박병원 경총 명예회장은 날카로운 시각으로 한국 경제를 진단하면서 한목소리로 “이념의 잣대를 걷고 실리를 추구하는 경제정책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 교수는 “우리 경제가 계속 어려울 것이다. 점점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당장의 회복을 기대하지 말고 긴 침체의 터널을 인내심 있게 지나가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 명예회장은 “숫자 하나하나에 울고 웃을 때가 아니다”라며 “성장률이나 수출 등이 플러스냐, 마이너스냐에 집착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우리 경제는 이미 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고 지적했다. 원로들은 한결같이 “최악의 경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 전 수석은 “국민소득 3만달러 이전의 고성장 시대와 달리 지금은 (성장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방이 꽉 막힌 상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제 이념이라는 잣대를 버리고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명예회장도 “우리는 지난 10여년간 아무런 혁신도, 성장동력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며 “이제라도 인공지능(AI)과 같은 무형의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 전 부총리는 노사관계부터 하나하나씩 풀 것을 제안했다. 그는 “지금의 노사관계로는 공멸뿐”이라며 “산업화 초·중기에 머물고 있는 노사관계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수렁에 빠진 한국 경제를 건져 올리는 데 앞장섰던 진 전 부총리는 현재의 경제 상황과 정부의 대책을 ‘날씨와 기상청’에 비유했다. 그는 “경제는 기상청처럼 오늘은 맑다, 오늘은 비 온다고 ‘현상’만 봐서는 안 된다”며 “경제성장률 숫자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추세를 그려보라”고 조언했다.


그는 마이너스로 고꾸라진 경제성장세에 대해 “분기별 성장률은 얼마든지 오르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세와 전망”이라며 “지금까지는 반도체 가격하락 외에 (경제성장률에 영향을 미친) 부정적인 영향이 별로 없었다면, 앞으로는 미중 무역분쟁 등 훨씬 센 악재들이 다가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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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장관’이라는 별명답게 진 전 부총리는 진단뿐 아니라 해법도 제시했다. 그가 내놓은 답은 ‘대결구도로 고착화된 노사관계 해소’다. 그는 “자동차 등 주요 제조기업들이 국내에 공장을 짓지 않고 해외로 나가고 있다”며 “지금처럼 너 죽고 나 살자 식으로 접근하면 떠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사가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데 서로 자기 주장만 하다가는 공멸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현 전 수석은 “그랜드플랜 수립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중 통상 마찰은 단순 무역전쟁이 아니라 안보와 이민 문제가 겹치면서 일종의 헤게모니 전쟁에 들어선 것으로 봐야 하는 만큼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대외 전략을 마련해야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한 개의 정책에 올인하기보다는 거시적·장기적 시각과 안목을 갖고 글로벌 경제전쟁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과거 30~40년 동안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수출만 잘해도 먹고살 수 있는 시기였다”며 “지금은 세상이 달라진 만큼 정부와 기업·국민 모두가 돌파구를 찾기 위한 대외전략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 전 수석은 청와대와 정부 부처의 안일한 모습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사안별로 옳고 그름에 대한 다툼만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이룰 때까지 우리나라가 겪은 정치·경제·사회 상황과 지금은 전혀 다르다”면서 “대외적으로 사방이 꽉 막혀 있는데도 유아독존으로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사회 인식을 되돌리고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라는 주장도 나왔다. 현 전 수석은 “과거 (일부) 기업에서 발생했던 비리 등을 근거로 부정적인 시각만 가지는 것이 답답하다”며 “이념과 같은 잣대보다는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며 “예를 들면 규제개혁처럼 기업을 둘러싼 환경을 완화해주기 위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잃어버린 10년’을 아쉬워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것이 오늘의 현실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제조업의 한계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비제조업 지식기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을 육성했어야 하는데 이미 흘러간 옛 노래가 됐다”면서 “지금 AI 등 무형의 4차 산업 물결이 들어오는데 이마저 중국에 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의 위기는 (10년 전) 금융 위기가 아닌 실물 위기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며 “성장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일자리도 창출하지 못하는 것이 현 위기의 본질”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일자리를 늘린다고 세금을 들여 파트타임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청와대와 정부뿐 아니라 야당도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운영 비전과 전략을 제언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조 교수는 “향후 경제는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만큼 이제 긴 안목으로 비전과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시적 효과에 그치는 단기 일자리나 재정 확대 등 임시방편적인 정책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현 정부 들어 성공한 정책이 거의 없다”며 “실패한 정책을 고집하지 말고 믿을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전략으로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박 전 총재는 “현재의 저성장이 오히려 정상”이라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출 주도 성장이 어려워지고 인구절벽으로 내수마저 줄어드는 상황에서 저성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정부와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각종 경제지표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양질의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도록 정부와 업계가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양극화나 실업으로 인해 성장의 질이 안 좋은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소득주도 성장에 오히려 역행하는 정책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나 경직된 주 52시간제 같은 정책들은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김능현·이연선기자 nhkimchn@sedaily.com

김능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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