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가 뒤에는 좋은 갤러리가 있다. 상업성 때문에 갤러리의 역할을 폄하하는 이들도 있으나 예술이 종교와 정치권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되면서 예술가에게 갤러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시대를 앞서 간 ‘천재 백남준’이라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일 수는 없었다. 그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굵직한 예술제·위성예술쇼·비엔날레였고 예술사적 업적을 공인한 것은 미술관이었지만, 작가 백남준을 가까이서 도운 것은 화랑들이었다.
잘 알려진 백남준의 첫 전시는 지난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였다. 그보다 앞선 1959년 뒤셀도르프의 갤러리22라는 작은 화랑에서 열린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 전시에서 백남준은 처음으로 피아노 부수기 퍼포먼스를 벌였다. 헌사와 경의의 대상이던 존 케이지는 당시 전시를 보지 못했지만 백남준과 ‘평생 절친’이 된 요셉 보이스가 이를 관람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서양 악기를 부순 것은 전통 예술에 대한 전복(顚覆) 시도였다.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도 기존의 격식에서 벗어나라는 외침이다. 이를 계기로 백남준의 이름이 유럽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시절 백남준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앙팡 테리블’이었는데 손에 잡히는 대로 부순 바이올린이 뒤셀도르프 시립관현악단의 명기여서 악단장이 “악기 살려달라”고 비명을 내지를 정도였다. 공연장에서 내쫓기기 일쑤였던 백남준과 보이스 같은 전위적 예술가들을 가리켜 조지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Fluxus)’라 명명했다.
수년에 걸친 파격행보 끝에 1963년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이 열렸다. 이 전시 개막식에 느닷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난 보이스가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백남준과 보이스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후 일본의 형님댁에 갔다가 뉴욕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각종 퍼포먼스를 펼치며 예술가로 자리 잡아 갔다. ‘작가들의 작가’였던 백남준에게 뉴욕의 유력화랑인 갤러리 보니노(Galeria Bonino)가 개인전을 제안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알프레도 보니노 보니노갤러리 대표는 뉴욕 외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브라질의 상파울루 등에도 전시장을 두고 있었다. 뉴욕에서는 1960년부터 활동했다. 보니노 덕분에 백남준은 1965년 처음으로 ‘전자예술(Electronic Art)’ 전시를 열었다. 반(反)예술 퍼포먼스에 집중했던 백남준은 TV 13대를 선보인 1963년의 첫 개인전 이후로 전자예술에 심취했다. 그해 1월 뉴스쿨(New School social Research)에서 무어맨과 공연하며 선보인 ‘자석TV’는 자석이 전자의 흐름을 바꿔 유기적 형태의 영상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작품이었다.
독학으로 전자공학을 연구한 백남준은 TV를 조작해 물속을 유영하는 해파리 같은 이미지, 떨리고 지직거리기를 반복하는 영상 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화가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필법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니노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에서는 TV모니터에 덩그러니 달 하나 뜬 것 같은 작품도 선보였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그의 표현처럼 백남준에게 달은 전통적인 추억의 소재이자 자연의 숭배대상이며 그리움의 정서를 담고 신령스런 힘을 지닌 특별한 의미였다. 전시 개막식은 대성황을 이뤘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NYT)는 백남준에게 극찬을 쏟아냈다. 백남준이 “뉴욕타임즈 만한 신문이 없어”라며 한평생 열독자가 된 이유이기도 했지만,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와 비디오아티스트로서의 확신을 얻는 계기가 됐다. 이후 백남준은 본격적으로 전자TV를 이용한 비디오예술을 선보인다.
1968년 4월 보니노갤러리는 백남준의 두 번째 전시를 열었다. 백남준은 전자광을 변형해 파도형·나선형·타원형 등의 무늬가 꿈들대며 춤추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관객이 조작해 영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참여TV’도 있었다. 누군가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내면 TV모니터에 소리의 높낮이가 나타나고 영상이 움직였다. 요즘은 첨단기술로 ‘인터랙티브 아트’가 활발하지만 그 시절에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백남준은 일찍이 관람객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이후 1971년 11월, 1974년 1월까지 보니노갤러리에서는 4차례에 걸쳐 ‘전자예술’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개인전이 열렸다. 1976년의 개인전 ‘하늘을 나는 물고기’는 TV들을 천장에 매달에 관람객이 누워서 감상하는 작품들이었으니 ‘돈 안되는’ 백남준을 위한 보니노갤러리의 광신에 가까운 믿음과 지지는 대단했다.
이와 동시에 백남준은 미국과 유럽의 주요 현대미술관에 초대를 받는다. 이 시기 플럭서스 그룹의 막내 작가이기도 했던 독일인 르네 블록이 베를린에 이어 뉴욕에도 화랑을 열어 백남준 전시를 기획했다. 백남준은 르네블록 화랑의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불현듯 위성예술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도 한다.
위성예술 ‘굿모닝 미스터오웰’로 전세계적 인지도를 확보한 백남준은 1985년 칼 솔웨이(Carl Solway) 갤러리, 1986년 할리 솔로몬(Holly Solomon) 갤러리와 일하면서 더욱 바빠진다. 칼 솔웨이 갤러리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공장지대에 있었다. 백남준은 시카고아트엑스포 출품을 계기로 만난 칼 솔웨이 갤러리에서 이듬해인 1986년 개인전을 열면서 TV를 사람형상으로 제작한 ‘TV 로봇’을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로봇 가족’은 고물 TV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부터 한창 발전하기 시작한 TV로 제작한 아기로봇까지 아우르며 기계가 인간을 대신할 인조인간의 시대상을 예고했다.
칼 솔웨이 갤러리와 일하면서 탄생한 작품들은 마무리가 깔끔하고 디자인적으로도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개인이 소장하기 좋은(collectable) 작품을 만들었으니 거래도 늘었다. 이를 통해 백남준에게 돈을 벌게해 줬다는 점이 칼 솔웨이의 공이다. 칼 솔웨이 화랑과의 작업에는 마크 파스팔, 그랜 다우닝 등이 조수로 참여했는데 이들의 미적 감각이 작품 완성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스승과 존 케이지의 이름과 새장을 이중적으로 뜻하는 ‘케이지(cage)’ 연작 등이 대표적이다. 1992년작인 효성그룹 본사의 ‘백제무령왕’과 여의도 산업은행(KDB)의 ‘동대문’ 등의 작품이 칼 솔웨이를 통해 제작됐다. 칼 솔웨이에서 제작한 작품들이 매무새가 좋기는 했으나 흡사 공장에서 상품 제작하듯 만들었기에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느낌의 ‘남준다운’ 작품과는 조금 달랐다. 지인들이 “남준답다”고 평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뉴욕의 작업실에서 제작됐다.
할리 솔로몬 갤러리의 설립자인 할리 솔로몬은 유대인 출신이며 뉴욕화랑협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미국 내 영향력이 막강했다. 주요 미술관의 이사회 임원이기도 했던 솔로몬은 백남준을 미국 주류사회로 끌어넣은 공이 컸다. 백남준이 유럽을 넘어 미국에서도 ‘뮤지엄 작가’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백남준이 공간 널찍한 그린 가(Green St.) 스튜디오를 구할 적에는 동양인이라 입주를 허락할 수 없다는 같은 층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가며 승인 사인을 받아준 이도 솔로몬이었다.
그녀는 1993년에 백남준이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선정됐을 때 베니스 앞바다에서 호화판 선상파티를 벌이고, 페기구겐하임 미술관 옥상에서 개막 전야제를 열어 그의 수상가능성을 드높여준 ‘든든한 뒷배’였다. 백남준의 온갖 실험적 작품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백남준이 1990년대에 몰입한 레이저 작품 전시를 위해 갤러리의 수도와 전기공사를 모조리 다시 할 정도였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해보는, 치기 어린 모습은 백남준과 솔로몬이 꼭 닮아있었다.
물론 정 많고 반듯한 백남준도 자신을 지원해 준 보니노, 칼 솔웨이, 할리 솔로몬 등의 화랑주와 여러 조수들의 고마움을 높이 평가했고 절대 잊지 않고 되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