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을 이끌어온 대형 연예기획사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통상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연예기획사로 SM·YG·JYP엔터테인먼트가 꼽힌다. 이들은 H.O.T.부터 동방신기, 빅뱅, 엑소(EXO), 트와이스 등 숱한 스타들을 탄생시키며 K팝 세계화에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K팝이 세계 음악 시장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대형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연예 기획사도 체질 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1인 대표의 카리스마와 선구안보다는 체계적인 시스템과 기획력이 더 중요해졌고 대중들도 3대 기획사 출신 가수라고 해서 무조건 열광하지 않는다. 이 같은 환경 변화와 맞물려 기획사 시장에 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YG는 빅뱅 멤버 승리의 버닝썬 사태에 이어 마약 수사 무마 의혹이 불거지면서 양현석 총괄 프로듀서와 양민석 대표이사가 결국 물러났다. YG는 20일 황보경 전 전무이사를 대표이사로 긴급 선임했다. SM도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지분 100%를 보유한 개인회사인 라이크기획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20년 넘게 유지돼온 기존의 엔테업계 시스템에 변화의 압박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YG 등이 주춤한 사이 방탄소년단(BTS) 소속사인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떠오르고 있다. 또 CJ ENM도 직접 연예인을 발굴하거나 관리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대형 기획사로 부상했다. CJ ENM은 8개에 달하는 레이블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고 엠넷채널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시리즈’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지난 3월 CJ ENM과 빅히트가 합작 법인 빌리프랩을 설립한 만큼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새 보이 그룹이 탄생할지도 관심사다.
◇창사 최대 위기 맞은 YG·행동주의 펀드 타깃된 SM=양 전 총괄 프로듀서는 소속 그룹인 ‘아이콘’ 리더 비아이(본명 김한빈)의 마약 수사 무마에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지난 14일 사임했다. 1996년 YG의 전신인 현기획을 세운 뒤 23년 만의 불명예 퇴진이다. YG를 둘러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올 초 빅뱅 전 멤버 승리의 버닝썬 사태, 양 전 프로듀서의 성 접대 의혹이 있었다. 이전에도 마약 사건에 연루된 YG 소속 연예인은 빅뱅 멤버 지드래곤, 탑 등 여럿이었다.
이 같은 사태가 반복된 이유로 ‘1인 황제 시스템’이 꼽힌다. 양 전 프로듀서가 소속 아티스트들의 일탈 행동에 대해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다 보니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기획사 특성상 권력이 쏠려 있는 게 일반적이지만 YG의 경우 양 전 총괄 프로듀서가 거의 전지전능한 위치에 있었다”며 전했다. 또 양 전 총괄 프로듀서는 서울 홍익대와 강남 인근에 클럽 NB 등을 운영하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클럽은 검은 세력이 침투하기 쉽고 위험 요소가 있는데 왜 굳이 저런 사업까지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승리 사태에서 대형 기획사인 YG가 연예인 관리에 실패했다며 책임론이 거론되는 이유다. YG 매출도 2017년 3,499억원에서 2018년 2,858억원으로 줄었다. 올해 증권사 평균 전망치는 2,845억원이다.
SM의 경우 소속 가수를 둘러싼 잡음은 거의 없지만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일면서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됐다. 최근 SM의 3대 주주로 지분 7.59% 보유하고 있는 KB자산운용은 “SM이 영업이익의 46% 규모 인세를 이수만의 개인회사인 라이크 기획에 지급하고 있어 소액주주의 이해와 상충한다. 사외이사를 선임해 이사회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강화하겠다”며 주주권 행사에 나섰다. SM은 소속 가수나 자체 제작 음반의 음악자문 및 프로듀싱 업무를 담당하는 라이크기획에 매출액의 최대 6%를 인세로 지급해왔다. 라이크기획은 지난 2017년 108억원, 지난해 145억원을 SM으로부터 받아갔다. SM이 2000년 상장 이후 한반도 배당을 하지 않은 것도 주주 무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4대 주주인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지분 5.06% 보유)도 “SM의 불투명한 경영 개선을 위해 적극 개입하겠다”고 압박에 나서고 있다.
이제는 기획사도 과거에 달리 상장사에 걸맞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셈이다. 아이돌 전문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엔터사의 역사가 오래되고 성장하면서 기존 시스템으로 여러 아티스트를 관리하는데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최근 들어 기획력이 더 중요해지면서 3대 기획사라는 후광보다는 틈새 시장을 노린 참신한 컨셉의 가수들이 더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BTS 신화’의 주역 빅히트·지분투자로 영토 넓히는 CJ ENM= YG·SM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빅히트가 더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2,142억원으로 전년의 924억원보다 2배 넘게 뛰었다. 영업이익률은 29.92%로, SM 7.8%, JYP 22.99% 보다 높다. 이는 ‘21세기 비틀즈’라고 불리며 K팝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BTS 덕분이다. 지난 2013년 데뷔 때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더니 차근차근 자신들의 음악 세계와 팬덤을 쌓아갔다. 특히 2015~2016년 완성도 높은 ‘화양연화’ 시리즈로 눈도장을 찍은 후 전 세계로 인기가 확산됐다. 이후 빌보드 200 차트 1위 등 한국 가수가 그동안 이루지 못한 기록을 잇따라 세우는 중이다.
올 들어서는 빌보드 뮤직어워즈 본상인 ‘톱 듀오/그룹’ 상을 한국 가수 최초로 수상했고, ‘팝의 성지’인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공연을 펼쳤다. 또 BTS와 방시혁 대표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정돼 내년 미국 그래미 어워즈의 수상자를 뽑을 권한을 부여받았다. 지난해 12월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BTS의 생산유발 효과는 연평균 4조 1,400억원, 부가가치유발 효과는 1조 4,2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CJ ENM의 물밑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CJ ENM은 연예인을 직접 육성하지는 않지만 지분을 보유한 연예기획사만 8개에 이른다. 음악사업 브랜드인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 하에 그룹 빅스·구구단 등이 소속된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워너원 소속사였던 스윙엔터테인먼트, 다이나믹듀오 소속사 아메바컬쳐, 박재범 소속사 에이오엠지(AOMG) 등이 있다. 현재 CJ ENM 만큼 많은 자회사를 거느린 곳은 없다. CJ ENM은 2000년대 후반 엠넷미디어 시절 이효리 등 연예인들을 직접 관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지분투자, 공동투자, 레이블 인수 방식으로 운영 중이다. 과거 CJ ENM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아티스트의 일탈은 사회적 파장이 커 대기업 이미지에 치명적”이라며 “이 같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선회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CJ ENM은 음악채널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시리즈를 통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16년 시즌 1이 시작된 프로듀스 시리즈는 재능 있는 중소 엔터테인먼트 업체의 연습생이나 개인 연습생들을 경쟁시켜 살아남은 이들을 K팝 그룹으로 데뷔시키는 콘셉트의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 등 아이돌 그룹이 탄생했으며 현재 시즌4가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3월 CJ ENM이 빅히트와 공동 설립한 기획사 빌리프랩에 대한 기대가 높다. BTS로 보이 그룹 기획 능력이 검증된 방시혁 빅히트 대표가 아티스트를 육성하고 CJ ENM은 지원을 강화하는 구조이다. 빌리프랩은 새로운 남자 아이돌 그룹을 2020년 데뷔시킨다는 목표 아래 내부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