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4일(현지시간) 이란 최고지도자를 정조준한 대(對)이란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이란의 미 무인기(드론) 격추에 대한 보복 카드로서 무력공격 계획을 접은 대신 이란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최고 종교지도자의 돈줄을 차단하고 직접 압박하는 카드를 택한 것이다. 이란은 사실상 이란 국가체제를 겨냥한 이번 조치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할 기회가 완전히 차단됐다고 반발하고 있어 양국 간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와 최고지도자실의 해외금융거래를 차단하는 내용이 담긴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이 미 드론 격추의 배후로 지목한 이란혁명수비대(IRGC)의 고위사령관 8명도 제재 명단에 올랐다. 앞으로 이들의 거래를 돕는 해외금융은 미 금융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정권의 적대적 행위에 대한 책임이 궁극적으로 하메네이에게 있다”며 “(하메네이) 정권이 핵무기 추구, 우라늄 농축 확대, 탄도미사일 개발 등 위험 활동을 포기할 때까지 압력을 높여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트위터에서 미국이 중국과 일본 등을 위해 보상도 없이 수년간 호르무즈 해상로를 지켜왔다며 각국에 호르무즈를 지나는 자국 유조선을 스스로 보호하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이번 조치로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에게는 이란 최고지도자가 임명한 관료를 제재할 권한이 주어졌다. 행정명령 서명 직후 므누신 장관은 “이번주 후반에 이란 외무장관도 제재 리스트에 올릴 계획”이라며 “행정명령으로 미국에서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이란 자산이 동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제재는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의 최고통수권자인 하메네이를 직접 겨냥해 이란에 대한 압박을 최고조로 높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란은 국민들이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을 선출하지만 국가원수는 종신직인 이슬람교 최고지도자가 맡는다. 이슬람법학자인 최고지도자는 행정부와 논의해 모든 정책을 결정·감독하는 것은 물론 군통수권과 전쟁 및 종전 선언권을 갖는다. 유조선을 피격했다는 혐의를 받는 혁명수비대의 통수권은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가 가지고 있다. 하메네이 제재는 곧 이란 경제활동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혁명수비대의 돈줄을 막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체제변화(레짐체인지)를 노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슈퍼매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이란이 핵합의에서 규정한 저농축 우라늄의 저장한도를 벗어날 경우 모든 옵션이 검토될 것이라며 압박을 이어갔다. 그는 이날 예루살렘에서 열린 미국·러시아·이스라엘의 고위급 안보회의를 마친 뒤 ‘이란이 핵합의에 명시된 저농축 우라늄 저장한도 300㎏을 넘을 경우 군사적 옵션이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7일 핵합의에서 정한 핵프로그램 감축·동결 의무를 일부 지키지 않겠다고 밝힌 이란에 군사적 조치까지 검토할 수 있다고 경고한 셈이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처럼 이번 제재가 이란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미 올 4월 이란혁명수비대를 테러단체로 지정하며 제재를 가한 상황인데다 국제금융 시스템에 대한 이란 지도부의 의존도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하메네이는 이란 밖을 나가지 않고 그가 장악한 단체들도 국제금융시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면서 이번 조치가 이란을 핵협상으로 복귀시키는 결정타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새 제재에도 마지드 타트트 라반치 유엔주재 이란대사는 “제재위협 속에서 미국과의 협상을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저항했다.
오히려 이란은 미국의 제재에 굴복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으며 맞서는 모습이다. 아바스 무사비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트위터에서 “이란 최고지도자에게 쓸모없는 제재를 가하는 것은 외교의 길을 영원히 폐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도 볼턴 보좌관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등을 ‘전쟁에 목마른 B팀’이라고 표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 주변의 매파 정치인들이 전쟁에만 집착한다고 비난했다.
이란 테헤란타임스는 이날 하산 로하니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이란이 미국의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자국을 찾는 외국인 여권에 방문 스탬프를 찍지 않을 방침이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