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대 핵심소재를 키우겠다.” 지난 2010년 지식경제부(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은 “세계 4대 소재강국으로 거듭나겠다”며 WPM(World Premier Materials)이라는 연구개발(R&D) 국책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스마트강판 소재, 나노카본 복합 소재, 고성능 이차전지 등 10개 사업단에 삼성·LG·포스코 등 대기업 주도로 중소기업,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 등 200곳가량이 참여하도록 했다. 올해 사업이 종료되는데 그동안 투입된 예산은 6,000억원을 훌쩍 넘는다.
산업부와 KEIT는 이 사업의 홍보를 위해 여러 번 코엑스에서 성과전시회를 개최하고 소재·부품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원정 전시회까지 열었다. “소재 기술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러 많은 특허와 고용창출이 이뤄지고 소재 강국인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10여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었다”고 지난해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우리나라에 반도체 기판용 감광제나 세정용 에칭가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용 폴리이미드 필름 3가지에 대해 수출규제에 나서기로 하면서 WPM 등 정부의 부품·소재 육성 R&D 전략의 허점이 드러났다. 2017년 사업이 완료된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용 기판소재 사업단은 일본산 소재에 의존하던 폴리이미드를 국산화하고 양산에 들어간다고 했으나 일본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초경량 마그네슘 소재 사업단은 철강·알루미늄보다 가볍고 재활용률이 높은 마그네슘 소재를 개발했다며 전시회에서 제품도 내놓았지만 이 사업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P사는 시장확대가 이뤄지지 않아 사업 재검토에 나섰다.
정부가 연 20조원을 대학·출연연·기업에 지원하는 R&D 기획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많다. R&D 기획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선진국을 모방하거나 유행을 따라가는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우리의 강점을 살리지 못하고 전략품목에 대한 예측능력도 크게 떨어진다. WPM 사업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1차 공격 무기로 내세운 반도체·디스플레이용 전략품목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게 한 예다.
정부 R&D 평가도 공무원이나 선정·감독기관 모두 성과를 포장하는 데 관심을 둘 뿐 냉정하게 과제를 평가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WPM 사업만 해도 제대로 된 평가 없이 후속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 R&D가 나눠 먹기, 보여주기 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정작 우리가 취약한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R&D 거버넌스 체계도 문제다. 정부 R&D를 집행하는 35개 부·처·청·위원회의 담당 공무원들은 1~2년 순환보직이라 R&D 업무에 익숙해질만 하면 보직이 변경된다. 부처끼리 조율이 안 돼 중복 연구가 많고 차별화가 이뤄지지 않는다. 대학·출연연·기업을 융합하는 정부의 R&D 전략도 부족하다. 한국연구재단이나 국가과학기술연구회 등 집행기관은 관리 위주 행정으로 R&D 기획이나 융합연구, 구조조정 측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학과 출연연 연구자는 인공지능 등 유행을 따라다니며 과제를 따 논문·특허 숫자에 관심을 둘 뿐 산업화는 부지하세월이다. 지난해 6만3,697개 과제에서 98% 이상 성공률을 기록한 정부 R&D의 민낯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물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등의 R&D 정책토론회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전직 정부출연연구원장 A씨는 “부품·소재 경쟁력을 앞세운 일본의 공격은 국제분업 체계가 무너지면 언제든 우리 산업의 밸류체인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R&D 기획·선정·평가 수준을 높이고 산학연 융합연구로 풀어야 하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