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4일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를 ‘보복적 성격’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일본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일본과의 외교마찰 확산을 우려해 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던 청와대가 공세적 대응으로 태세를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외교·안보 사안과 관련해 정제된 입장을 내놓는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일본 문제와 관련한 강경 메시지가 나온 것도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청와대는 이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의 NSC 상임위에서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를 ‘세계무역기구(WTO)의 규범과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보복적 성격’이라고 규정하면서 “일본이 이러한 조치를 철회하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대응방안을 적극 강구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외교적 대응방안은 WTO 제소를 포함한다”며 “일본이 취한 조치의 부당함과 자유무역주의 위배 사실 등을 주요국에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청와대가 일본의 조치를 ‘보복적 성격’으로 규정한 데 대해 “아베 신조 총리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채널을 총동원할 것이며 아베 총리가 이 사태의 책임자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청와대의 이 같은 태세 전환은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글로벌 전자업계에서도 일본의 조치가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데서 힘을 얻은 것으로 풀이된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날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이유로 한국과의 신뢰 저하를 꼽은 아베 총리의 발언에 대해 “WTO 체제에 위배되는 말을 직접 한 것”이라고 밝혔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역시 이날 일본의 조치를 강력히 성토하며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외교적 대응 및 상응조치를 청와대까지 공식 언급하면서 우리 정부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우리 정부는 일단 외교채널을 통해 일본 조치의 부당함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환기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정부가 꺼낼 수 있는 카드로는 반도체 수출 제한을 포함한 수출입 규제 강화가 거론된다. 하지만 이 경우 양국 모두 극단적으로 피해가 커질 수 있어 다른 국가와의 공조 체제로 대응하며 일본과 양자협의를 진행하는 투트랙 전략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단기간에 우리 기업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부가 가용할 방법은 양자협의를 통해 직접적으로 일본의 수출규제를 푸는 것이다. 유 본부장은 이날 관계기관 회의에서 “일본의 조치는 당사국 간 협력에 기반한 집단안보 전략물자 수출통제 체제를 훼손하고 흔드는 것”이라며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며 한국이 기제안한 양자협의에 조속히 응하라”고 촉구했다.
정부는 일본의 이번 조치가 한국만을 겨냥해 전략물자제도의 근간인 바세나르체제 지침을 위배하고 원칙적으로 상품수출 제한을 금지하는 WTO 관세 및 무역일반협정(GATT) 11조를 위반했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3일 일본 경제산업성에 수출통제 양자협의를 요청했으나 아직 답변을 받지 못한 상태다.
대화로 풀리지 않고 강대강으로 맞붙는다면 우리 정부의 보복조치로 ‘전략물자 통제’가 검토될 수 있다. 전략물자 통제는 대량파괴 및 재래식 무기의 제조·운반에 이용될 수 있는 물품이나 기술인 전략물자가 특정 안보우려 국가나 테러집단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아울러 우리가 일본에 수출 절차를 간소화해준 부분의 규제를 강화하는 조치도 가능하다. 현재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처럼 수출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전략물자 수출 관리 ‘가’ 등급인 일본의 등급을 낮춰 똑같이 대응하는 것이다.
아울러 세계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의 일본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 반도체는 군사용 등으로도 쓰여 전략물자처럼 국가가 수출을 통제할 근거조항이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홍 부총리는 이날 “일본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출규제나 경제조치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WTO 결과가 나오기까지 2~3년은 족히 걸리기 때문에 고려하는 단기대응책이다. 다만 보복조치가 반복되면 경제전쟁으로 번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는 게 부담스러운 요소다.
일본이 과거 중국의 희토류 수출제한에 대처한 방식을 원용해 미국·중국·유럽연합(EU) 등 주요 산업국이 연대하는 방법도 있다. 세 가지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로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을 경우 반도체 가격 상승과 함께 연관산업으로의 파장이 클 수밖에 없으므로 주요 산업국 간 대일본 압박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정부는 아울러 100대 핵심부품·소재·장비 연구개발(R&D)에 추가경정예산안을 비롯해 연간 1조원씩 5년간 6조원가량을 투입하기로 했다. /윤홍우기자 세종=황정원기자 seoulbir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