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10시,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311호 대법정. 아직 재판부가 들어오지 않은 상황에 세 명이 피고인은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법행정권 남용’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들이다. 이들은 웃는 얼굴로 방청석에 앉은 지인에게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기도 했다. 그동안 10차례 넘게 진행된 재판 중 가장 밝은 모습이었다.
재판 직후 기자와 만난 서울중앙지법 부장 판사는 “최근 상황을 보면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재판에 임하는 태도가 밝아질 수 밖에 없지 않느냐”며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대해 수출규제 조치하는 상황을 보면서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법원 내 보수 쪽 인사들 뿐만 아니라 비판의 시각으로 보던 판사들도 하나 둘 양 전 대법원장을 옹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진실여부와는 별개로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의 최종 결론을 내리는 데 신중을 기했던 양 전 대법원장 사법부의 행동이 재평가 받고 있다는 뜻이다.
◇강제징용 사건 시발점은 2012년 대법원 판결 = 지난 3일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자신의 블로그에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과 일본의 통상 보복’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일본의 수출규제 보복 배경을 짧게 설명했다. 2012년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국가 사이에 이뤄진 배상과 별도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취지였다.
이후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에 따라 고법은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으나 대법원으로 올라간 사건은 5년이 넘도록 선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10월이 돼서야 대법 판결이 나왔다.
강 부장판사는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판결 이외의 외교적·정책적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어 준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어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와 외교부의 강제징용 사건 관련 의견 교류에 대해 “외교부는 외교 사안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전달해 사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이라고 주장한 김영원 전 네덜란드 대사의 기고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결국 양 전 대법원장 당시 사법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을 지연시킨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외교 문제와 국익을 고려한 처사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여론이 법원 내에 퍼지고 있는 셈이다.
◇‘직권남용죄’ 위헌신청 봇물 = 직권남용죄에 대한 위헌신청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점도 양 전 대법원장 등 피고인들의 표정이 밝을 수 있는 이유다. 양 전 대법원장이 받는 47개 혐의 중 41개가 ‘직권남용죄’이기 때문이다. 형법 123조에서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범죄로서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로 규정한다. 하지만 법 적용 범위와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지난달 19일 배득식 전 기무사령관 변호인단 측은 법원에 직권남용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 특히 배 전 기무사령관측 변호인단에는 13년 전 ‘직권남용죄’가 위헌이라며 소수의견을 냈던 전 헌법재판관이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도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죄가 위헌인지 따져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위헌심판을 신청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관련자들에게 직권남용 혐의가 무더기로 적용돼있는 만큼,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위헌 논란이 다시 불붙으며 재판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