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규제로 우리 주력산업이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소재·부품·장비의 수출규제가 확대될 수 있는데 차제에 산업구조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공학한림원(회장 권오경)이 9일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개최한 ‘한국 산업의 구조전환:공학한림원의 진단과 처방’ 토론회에 참석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저마다 위기감을 표하는 한편 이를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자성도 잊지 않았다.
양웅철 현대자동차그룹 고문(전 부회장)은 “작금의 위기상황에 대한 깊은 사회적 공감대를 이뤄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애써 이뤄놓은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들이 중소·중견기업이 개발한 소재·부품·장비 사용에 나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강인병 부사장(CT0)을 대리 참석하게 한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은 “대기업 역시 원가와 이익 등 경제적 관점으로만 보지 말고 핵심산업 육성 차원에서 국산 재료·부품·장비 사용을 적극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권오경 공학한림원 회장도 “우리가 5년 내 산업구조를 개편하지 못하면 10년 후를 장담할 수 없다”며 중국의 ‘메이드 인 차이나 2025(중국제조 2025)’에 빗대 ‘인더스트리 트랜스포메이션 2030(산업전환 2030)’ 구상을 밝혔다. 공학한림원은 2020~2021년 단계적으로 발표하기로 한 ‘산업전환 2030’ 비전과 행동계획 수립을 앞당기기로 했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CEO들의 기업은 일본의 수출규제에 직접적인 피해가 우려되는 곳들이다.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의 경우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플루오린폴리이미드·포토레지스트·에칭가스) 수출규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이고 현대자동차와 LG화학도 수소전기차와 2차전지 등으로 수출규제 전선이 넓혀진다면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분석된다.
日 수출규제 경쟁력 갖춘 韓 전기차 배터리로 확대할 수도
중기 제품 적극 사용...기술력 키우고 원재료 안정적 확보를
무엇보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주력산업에서 일본산 소재·부품·장비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한 부회장은 “5G(5세대) 통신, 사물인터넷(IoT), 4차 산업혁명 등 초연결 시대에는 모든 기기와 장소에 디스플레이가 장착될 텐데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는 우리나라가 시장 주도권을 갖고 있는 성장산업”이라며 “하지만 재료·부품·장비의 상당수가 수입에 의존해 있어 일본의 수출규제에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컴퓨터 등에 쓰이는 소형 OLED 패널의 경우 삼성디스플레이가 세계시장의 9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으나 소재 등은 일본에 많이 의존해 있는 실정이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외에 화학이나 전기차 등으로 위기가 확대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노기수 LG화학 사장은 “전기차 시장은 중국·유럽·북미를 중심으로 5년 내 전체 자동차 시장의 1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고성장이 예상된다”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기차용 배터리 2차전지에서 기술개발을 무기로 경쟁력 우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중국·유럽의 공격적인 투자로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업계에서는 일본이 전기차 배터리 소재로 수출규제를 넓히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상황에서 바인더는 일본 기업이 독점하고 있고 양극재, 알루미늄 파우치, 전해액 첨가액 등도 일본 의존도가 높다고 보고 있다.
양 고문은 “국내 자동차 산업은 부품 업계의 자립적 생태계가 확립돼 있고 미래차를 이끌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힘줘 말했다. 업계에서는 자동차 분야도 일본이 수소전기차의 소재·부품이나 일반 자동차용 고부가가치 소재의 수출규제에 들어간다면 파장이 확대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날 CEO들은 일본 수출규제에 대한 대처뿐만 아니라 국가 연구개발(R&D) 혁신이나 대·중기 상생, 핵심인력 양성에 관한 조언을 쏟아냈다.
노 사장은 “원재료의 많은 양을 수입하는 상황에서 보다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원재료 수급과 차별화된 기술개발이 시급하다”며 “정부의 R&D 강화와 소재·부품 확보 노력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한 부회장은 재료·부품·장비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기업이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도록 R&D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재료·부품·장비 국산화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테스트베드가 필요하다며 현재 추진 중인 ‘디스플레이 혁신공정센터’가 실질적이고 영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확대를 요청했다.
그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한 국책과제에서 주관기업이 대부분 중소·중견기업으로 한정돼 있다”며 “LG디스플레이도 국책과제를 주관하며 투명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를 개발했는데 대기업이 주관하면 상업화 확률이 높아 중소·중견기업과 대학, 연구소와의 동반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기업에 대한 R&D 지원은 초기에 대기업 위주로 진행하다가 2017년에는 전체 R&D 예산(19조3,927억원)의 2.2%까지 줄였다.
이날 인공지능(AI) 등 핵심인력 양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강인엽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 사장은 “5G와 AI가 차세대 산업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삼성전자는 핵심기술인 5G 모뎀과 AI NPU 사업 강화를 통해 시장을 주도하고 국내 주요 대학과 선행기술·인력을 확보해나갈 예정”이라며 “정부와 학계도 인력 육성에 힘써주셨으면 좋겠다”고 촉구했다. 한 부회장도 “정부가 전문인력 육성과 창의적 교육시스템 구축, 청년 창업정신 제고를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