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에서 귀국한 바로 다음날인 13일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긴급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것은 그만큼 삼성의 위기감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부회장이 ‘컨틴전시플랜(비상경영계획)’ 마련을 지시한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관측이다. 시장에서는 이 부회장이 일본 현지 재계 관계자 등을 만나 소재 공급 상황, 여론 동향 등을 파악한 결과 최악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이 부회장이 이번 회의를 통해 “다소나마 (소재 수급에) 숨통이 트였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소재 조달에서 손에 잡히는 구체적 성과보다는 일본 재계 원로들로부터 협조 당부 등에 긍정적 답변을 얻는 정도의 소득일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재계의 한 임원은 “수출 규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이 워낙 완강해 선대부터 내려온 아무리 탄탄한 일본 현지 인맥으로도, 또 삼성에 대한 일본 기업의 우호적 감정에도 이 부회장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수출 규제 대상인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세 개 소재별로 일부 물량 확보에 성공했을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일본 현지 기업의 해외 공장 등을 통해 최소 2주에서 한 달 정도에 불과한 고순도 불화수소 등의 추가 물량 확보를 약속받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이번 회의를 통해 시나리오별 경영 로드맵 마련을 강하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을 둘러싼 환경을 보면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 일본의 소재 수출 규제,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한 검찰 수사 등 악재로 겹겹이 포위된 형국에 가깝다. 주력 사업인 반도체만 해도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가 규제 대상에 포함돼 메모리뿐만 아니라 비메모리 사업에서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마당에 미국 정부는 적극적 중재에 미온적이라 사태가 더 악화될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부회장은 특히 보호무역과 일본의 수출 규제 등으로 글로벌 서플라이체인에 근본적인 변화가 올 수도 있는 만큼 만전을 당부했다는 소식이다. 삼성 소식에 정통한 한 재계의 임원은 “이 부회장이 단기 현황 대처에만 급급해서는 글로벌 경영 환경 변화라는 도도한 흐름을 놓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글로벌 무역의 큰 흐름을 파악해야 제대로 된 사업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특히 이 부회장은 “비상경영계획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번 수출 규제의 불똥이 반도체·디스플레이를 넘어 스마트폰·TV 등 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이 일본에 치중된 소재 공급을 대만·중국·러시아 등으로 다변화하고 국내 소재 업체 육성 등에도 힘을 보태라고 지시한 것도 장기적 차원의 리스크 헤지를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경제 단체의 한 임원은 “삼성으로서는 ‘퍼펙트 스톰’이 몰려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라며 “정부나 검찰 등 외부에는 ‘삼성에 대한 불확실성 해소에 나서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효과를 노렸을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이 부회장이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 흔들리지 않고 시장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을 키우자”고 강조한 것도 조직에 긴장감을 주입하기 위한 의도가 깔린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비메모리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제조)에서는 대만의 1위 업체 TSMC와 격차가 확대되고 메모리에서는 마이크론·도시바 등과의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미국과 일본의 한국 반도체에 대한 집중적인 견제가 시작됐다’는 시각이 있는 만큼 절박함을 갖고 업무에 매진해달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재계에서는 비상시국에 이 부회장의 존재감이 도드라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위기일수록 총수로서 구심점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삼성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시기인데 그 어느 때보다 이 부회장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 시점”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