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포춘US]클라이너 퍼킨스 제국의 몰락

KLEINER PERKINS A FALLEN EMPIRE

한때 실리콘밸리의 벤처 캐피털 업계를 대표하던 전설적인 투자사가 20년 연속 손실을 보고 있다. 이 회사는 이 시대의 가장 유망한 기업들에 대한 투자 기회도 놓쳤다. 그 대신 재생 에너지 투자라는 끔찍한 악수를 뒀다. 게다가 차기 후계자 양성에도 실패했다. 그렇다면 클라이너는 예전의 ‘마법’을 되찾을 수 있을까? By Polina Marinova


5년 전쯤, 블라디미르 테네프 Vladimir Tenev와 바이주 밧 Baiju Bhatt?혁신적인 잠재력을 가진 수수료 무료 증권앱 ‘로빈후드 Robinhood’의 창업자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이제 막 설립한 자신들의 스타트업을 위해 투자 유치에 나섰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1,300만 달러의 투자를 원했다. 자신들의 사업 아이디어를 6,100만 달러의 가치로 평가한 것이다. 스탠퍼드대학의 같은 과 친구였던 둘은 당시 서른 살 생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다른 창업자들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저명한 벤처 캐피털 회사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앤드 바이어스 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에게 투자를 요청한 것이다.

클라이너는 관심을 보였다(오프라 윈프리가 할리우드의 대명사인 것처럼, ‘클라이너’라는 이름만으로도 샌드 힐 로드 Sand Hill Road /*역주: 벤처 캐피털 회사들이 모여있는 실리콘밸리 지역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회사는 로빈후드에서 많은 기회를 포착했지만, 투자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5년 중반 당시, 기업가치가 2억 5,000만 달러로 커진 로빈후드가 5,000만 달러의 투자를 추가로 유치하려 했다. 하지만 클라이너는 이번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2017년 또 다시 1억 1,000만 달러를 조달한 로빈후드는 13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달성하며, ‘유니콘’에 등극했다. 이번에 퇴짜를 놓은 것은 다름아닌 그 스타트업이었다: 로빈후드가 펀딩 참여 가능한 투자 회사 리스트에서 클라이너를 배제한 것이다.

양측 협상 관계자들에 따르면, 작년 초가 되어서야 로빈후드와 클라이너는 마침내 연결됐다. 당시, 로빈후드는 증권업계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 신생회사의 ‘제로 수수료’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피델리티와 TD 아메리트레이드, 찰스 슈와브는 앞다퉈 수수료를 인하했다. 계속 높아지는 가격에도 잇따라 투자 기회를 놓쳤던 클라이너는 결국 3억 6,300만 달러 규모의 펀딩에 참여했다(로빈후드의 기업가치는 이제 56억 달러로 평가 받고 있다). 그나마 2011년 이후 클라이너에서 파트너로 활동한 월가의 유명 애널리스트 메리 미커 Mary Meeker의 지원 덕분이었다.

유망 스타트업의 초기 펀딩에 참여하지 못하고, 결국 추후에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무능함’은 한때 업계를 주름잡던 이 전설적인 회사에서 아주 흔한 풍경이 됐다. 클라이너는 2000년대 페이스북을 포함해 소위 ‘웹 2.0’ 세대의 IT기업 투자에서도 비껴 서 있었다. 2010년대 당시 가장 핫한 스타트업들에 대한 초기 투자?벤처 캐피털 투자의 전통적인 먹잇감이다?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헛스윙’이 뜻밖의 반전을 맞았다: 클라이너가 미커를 중심으로 새 전략을 짜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녀는 성숙기에 접어든 비상장 기업들?안정보다는 성장을 위한 자본이 필요하다?에 초점을 맞춘 ‘사내 독립 펀드’를 운영했다.

좀 더 자리를 잡은 기업에 대한 ‘성장 투자’는 ‘벤처 투자’보다 리스크가 다소 적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수익도 더 낮은 편이다. 하지만 미커의 성장 투자팀은 벤처 투자팀을 능가하는 실적을 올렸다(클라이너를 장기간 이끌어온 존 도어 John Doerr와 수년간 그와 함께 일하다 떠난 무명의 투자가들이 번갈아 가며 벤처 투자팀을 운영했다). 당시 가장 전도유망한 기업들의 지분 투자를 주도한 주인공은 벤처캐피털 투자팀이 아닌 바로 미커였다(슬랙 Slack, 다큐사인 DocuSign, 스포티파이 Spotify, 그리고 우버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다 보니 투자업계의 오랜 관행처럼, 논공행상을 둘러싼 갈등이 촉발됐다: 즉, ‘기여도’와 더욱 중요하게는 ‘성과금 분배’에 관한 논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클라이너 내부에 실력 격차에 따른 ‘계급 체계(Class System)’가 생겨났다. 외부 업계와 특히 클라이너로부터 투자 유치를 고려 중인 창업가들은 이 흐름을 분명하게 감지했다: 미커가 이끄는 투자팀은 A급으로 인정받은 반면, 벤처 투자팀은 기껏해야 B급 대우를 받았다. 벤처 캐피털을 연구하는 스탠퍼드대학 금융학과 교수 일리아 스트레불라에브 Ilya Strebulaev는 “20년 전, 클라이너 퍼킨스는 벤처 캐피털 업계의 정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수 많은 경쟁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그 다음 일어나는 현상은 비즈니스 업계에서 흔한 이야기다. 한때 자부심이 강했던 거물이 업계 흐름에 뒤떨어져 벼랑 끝으로 몰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울러 클라이너스의 사례는 후계자 계획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후계자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많은 후보자들 중에서 최종 후계자를 신속하게 고르는 일은 매우 까다롭고 어렵다. 클라이너의 사례는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회사 파트너들이나 입이 무겁기로 악명 높은 벤처 캐피털 관계자들도 지난 몇 년간, 클라이너에서 발생한 일을 언급하는데 관심이 없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도어와 미커, 다른 클라이너 파트너 모두는 이번 기사와 관련한 인터뷰나 코멘트를 거절했다. 하지만 20명 이상의 전현직 직원과 클라이너 펀드의 투자자, 창업가, 그리고 다른 업계 관계자들은 잘못된 점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아울러 가능하다면, 회사가 과거의 마법을 회복할 방법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클라이너의 황금기(1972년 설립부터 구글에 1,180만 달러를 투자한 1999년까지)에는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회사는 탠덤 컴퓨터스 Tandem Computers와 제넨텍,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일렉트로닉 아츠, 넷스케이프, 아마존닷컴 같은 대표 스타트업들에 전설적인 투자를 했다. 물론 매출이 전무한 기업에 초창기 투자한 다른 벤처 캐피털 회사들처럼, 클라이너도 골치 아픈 투자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인 투자 성적은 눈부셨다: 일례로, 90년대 중반 회사의 한 펀드는 투자 1달러당 32달러의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클라이너의 영향력은 샌드 힐 로드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고했다. 실리콘밸리 역사가 레슬리 베를린 Leslie Berlin은 “클라이너보다 더 투자를 잘하는 회사는 없었다. 그것은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승인’의 신호였다. 창업가들에게는 전능한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20년 동안, 회사의 가장 유능한 투자자는 존 도어였다(하지만 공식적으로 최고경영자는 아니었다). 인텔의 영업맨 출신인 그는 1980년 클라이너에 합류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실질적인 수장에 올랐다. 도어는 투자 측면에서 넷스케이프와 아마존, 구글로 이어지는 ‘연속 히트’를 쳤다. 아울러 가장 잘 나가는 IT 기업들의 이사회에 적극 참여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인터넷 시대에 실리콘밸리를 지지한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도어는 강력한 영향력을 앞세워, 클라이너의 전체 중심축을 ‘인터넷’에서 자신이 최근 공을 들인 ‘열정 프로젝트(Passion Project)’로 이동했다: 바로 IT투자 열풍을 이어갈 것으로 믿었던 ‘재생 에너지’ 섹터였다. 민주당 후원자로 유명했던 도어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고어를 클라이너의 파트너로 영입했다. 회사는 2004~2009년 54곳의 ‘친환경 기술’ 기업에 6억 3,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22명의 파트너 중 12명이 소위 ‘친환경 투자’에 시간 일부나 대부분을 투입했다.

회사 의도가 좋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투자들은 실패했다. 전기차 제조업체 피스커 오토모티브 Fisker Automotive 등 일부 기업들은 파산했다. 연료전지 제조업체 블룸 에너지 Bloom Energy 등 다른 기업들은 2002년 클라이너가 투자한 이후, 기업공개까지 16년이나 걸렸다. 결과적으로 회사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경쟁사들은 디지털 경제 투자로 대박을 터트렸다. 일례로, 액셀 파트너스 Accel Partners는 페이스북에 초기 투자했다. 유니온 스퀘어 벤처스 Union Square Ventures는 트위터에 가장 먼저 투자했다. 이베이의 초기 투자에 성공한 벤치마크 캐피털 Benchmark Capital도 초기 투자로 우버 지분을 인수했다.

일러스트=포춘US일러스트=포춘US



도어는 클라이너를 불행한 투자 섹터(재생 에너지)로 몰아갔다. 더욱이 회사가 힘든 시기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만한 투자팀 구성에도 실패했다. 대신 투자 경력이 전무하거나, 함께 어려움을 견딘 경험이 없는 유명 인사의 영입에만 매달렸다.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전략 고문’, 그리고 앨 고어는 ‘전문 투자자’로 각각 합류했다. 그리고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창업자 겸 기술 전문가로 찬사를 받는 빌 조이 Bill Joy는 9년 간 클라이너의 파트너로 일했다. 또 다른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공동창업자이자 도어가 가장 가까이 뒀던 투자자 비노드 코슬라 Vinod Khosla는 2004년 회사를 떠나, 투자회사 코슬라 벤처스를 창업했다. 그는 지금 샌드 힐 로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러스트=포춘US

클라이너는 또한 (내부에서 키운) 많은 순수 혈통의 젊은 투자자들이 최고 자리로 승진하지 못하고, 몇 년간 일하다가 떠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중 다수가 벤처 캐피털 업계에서 차세대 경영자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클라이너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일례로, 스티브 앤더슨 Steve Anderson은 2000년대 초반 클라이너에서 4년간 근무했다. 그는 창업 후 인스타그램의 최초 투자자가 됐다(회사는 나중에 10억 달러에 페이스북에 매각됐다) 그리고 에일린 리 Aileen Lee는 한때 드물었던 기업가치 10억 달러의 스타트업을 일컫는 ‘유니콘’이라는 용어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 그녀는 카우보이 벤처스 Cowboy Ventures를 경영하고 있다. 트라에 바살로 Trae Vassallo는 클라이너 역사상 최대 성공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온도조절기 제조사 네스트 Nest에 대한 투자를 주도했다. 이후 초기 단계에 집중하는 투자회사 디파이 Defy를 설립했다.


끊임없는 인재 유출로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창업가들은 클라이너에서 누가 자신들을 도와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도어는 자신의 은퇴 이후, 누가 회사를 이끌지 암담했다. 비단 클라이너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심각한 상황이었다. 벤처 캐피털 업계의 역사를 다룬 저서 ‘크리에이티브 캐피털 Creative Capital’의 저자 스펜서 안테 Spencer Ante는 “벤처 캐피털 회사들은 항상 후계자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이 개성이 강한 인재들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일부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권력을 더욱 잘 포기한다”고 설명한다. 도어의 경우, 유능한 인재에게 적절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능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직 클라이너 투자자는 “나는 해답이 존과 그의 ‘슈퍼히어로’ 집착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당신이 입사할 때 이미 슈퍼히어로가 아니라면, 클라이너에서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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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략과 자신만큼 강력한 인재가 필요했던 도어는 이 둘 모두를 찾아냈다. 그는 2010년 클라이너의 첫 ‘성장’ 펀드를 조성했다. 회사가 유망 스타트업을 초기 단계에 잡지 못하더라도, 그 성장이 완성되기 전에 잡으면 된다는 계산을 했다. 10억 달러 규모의 신규 펀드 운용을 위해, 2011년 그는 회사와 오래 알고 지내던 모건 스탠리의 메리 미커를 설득했다. 그녀는 실리콘밸리가 있는 서부로 옮겨, 자신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투자자로 변신했다. 그녀의 영입은 클라이너를 부분적으로 소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회사는 결국 둘로 쪼개졌다.

미커는 뉴욕에서 리서치 애널리스트로서 대부분의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이미 실리콘밸리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애널리스트들과 투자 은행가들이 친밀하게 일하던 시대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넷스케이프와 아마존, 구글?모두 클라이너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있다?같은 인터넷 기업들을 열렬히 지지했다. 덕분에 모건 스탠리가 이들의 기업공개(IPO)의 주간사로 선정됐다. 하지만 새로운 금융 규제법으로 인해, 투자 은행이 거래(IPO나 M&A) 성사의 대가로 애널리스트에게 보상하는 것이 금지됐다. 때마침, 신규 펀드를 운용해 달라는 도어의 제안이 그녀에게 이직의 기회로 작용했다. 2012년 IT매체 와이어드 Wired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항상 투자 업무를 원했다. 클라이너 팀이 10년 간 내게 합류를 권했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녀의 두터운 인맥과 IT트렌드를 읽어내는 실력은 곧바로 빛을 발했다. 클라이너의 신규 성장 펀드는 페이스북, 렌딩클럽, 다큐사인, 스냅챗, 그리고 슬랙 등의 기업들에 투자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벤처 캐피털리스트들로부터 시드머니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미커가 투자할 당시, 더 성장할 여력이 많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투자 수익률은 놀라웠다. 회사가 투자자들에게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클라이너의 성장 펀드는 작년 말 기준으로 그 규모가 2.4배나 커졌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클라이너의 벤처 펀드를 능가하는 성적이었다. 리스크를 크게 줄여 설계한 후기 단계 투자펀드가 오히려 실적이 더 좋았던 것이다..

미커의 성공 신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클라이너가 초기 단계에 단행한 투자는 계속 헤매고 있었다. 특히 경쟁사들, 그리고 회사의 화려한 과거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물론 성공 사례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파트너로 일한 테드 슐레인 Ted Schlein은 여러 보안 소프트웨어 기업들에 투자했다. 그리고 이후 매각 과정에서 상당한 수익을 거뒀다. 랜디 코미사르 Randy Komisar와 트라에 바살로는 (구글이 2014년 32억 달러에 인수한) 네스트에 초기 투자를 주도했다. 하지만 그런 성공 사례만으로는 부족했다. 더욱이 클라이너는 계속 더 큰 투자 기회들을 놓치고 있었다. 2010년 조성된 펀드 규모는 2배 늘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의 벤치마크 펀드가 우버와 스냅챗 투자로 투자자들의 자본을 25배 키운 것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클라이너가 수 많은 방해 요인들에 직면했다는 점도 도움이 안됐다. 회사가 투자한 대체 에너지 섹터가 망하거나, 그럴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어는 또 다른 회사의 인수를 시도함으로써, 2014년 일찌감치 불거진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전 페이스북 임원 차마스 팔리하피티야 Chamath Palihapitiya에게 접근했다(직설적인 성격인 그는 당시 세 번째 펀드 조성을 준비 중이던 소셜 캐피털 Social Capital의 핵심 인물이었다). 도어는 개인적으로 소셜 캐피털에 투자를 했다. 실리콘밸리의 핵심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는 팔리히피타야의 ‘도전 정신’과 ‘인맥’이 클라이너의 문제들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협상은 무산됐다. 팔리히피타야가 클라이너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 정도 갖느냐가 이슈였다(그는 이번 기사에 대해 언급을 거절했다). 같은 시기에, 클라이너는 힘겨운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도어의 부하 직원이었던 엘렌 파오 Ellen Pao가 성 차별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회사는 승소했지만 많은 상처를 입었다. 도어는 새로운 ‘인재 사냥’을 이어갔다. 회사 경영을 도왔던 슐레인과 그는 소셜 캐피털에서 그 인재를 찾았다. 도어가 과거 영입을 추진했던 바로 그 회사다. 그들은 소셜 캐피털의 또 다른 공동 창업자 마문 하미드 Mamoon Hamid를 영입했다. 결국 하미드는 초기 단계 투자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슬랙에 대한 소셜 캐피털의 투자를 주도했던 그는 2017년 클라이너에 합류했다. 도어가 회장에 오른 바로 다음해였다(회장은 벤처 캐피털 회사에서 일종의 명예직이다). 도어는 하미드를 클라이너의 새 수장으로 소개했다. 이로써 그는 이미 스스로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미커와 갈등을 빚게 됐다.

하미드(41)는 클라이너에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에게 회사가 제공하는 무료 식사에 대해 설문을 실시했다. 그는 이메일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맛이 뛰어난 고급 음식을 제공하고 싶다”고 밝혔다. 음식에 대한 강조는 돈보다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결국, 그의 영입 목적은 회사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클라이너는 몇 개월 후 연례 휴일 파티 장소를 바꿨다. 교외의 고루한 멘로 서커스 클럽 Menlo Circus Club에서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 Tenderloin 지역의 트렌디한 장소로 옮긴 것이다. 당시 하미드는 이름표를 제공하는 등의 구태의연한 관행을 없애자고 주장했다.

곳곳에서 불만의 신호가 감지됐다. 하미드의 권한 행사가 세대간의 에티켓과 한참 늦어진 회사 웹사이트 개편 같은 (가벼운) 문제를 넘어, 광범위하게 미쳤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관심을 성장 펀드를 포함, 회사 전체의 운영으로 돌렸다. 예를 들어, 그는 성장 투자팀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자 아이디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투자 주선 제안까지 했다. 그는 어떤 펀드에 어떤 형태의 투자가 적합한지에 관한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즉, 그는 초기 단계 펀드가 성장 펀드의 파이를 더 많이 가져가는 그림을 구상했던 것이다. 클라이너 내부 인사들은 “하미드는 자신이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커의 팀은 그의 제안을 간섭으로 여겼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두 펀드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클라이너 파트너들은 서로의 투자 수익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미커 펀드의 성공은 다른 파트너들에게도 이익이 됐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이익을 공유할지가 곧 논쟁거리가 됐다. 회사는 투자가들의 협업을 유도하기 위해 인센티브를 공유했다. 하지만 보상 체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전직 클라이너 투자자는 “갑자기 미커의 대규모 성장 펀드가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공로를 차지하고, 자신 몫을 챙기기 위한 로비가 펼쳐졌다. ‘내가 이걸 했다’ 그리고 ‘내가 저걸 도왔다’라는 식의 주장들이 나왔다”고 말한다. 성장 펀드팀과 가까운 인사에 따르면, 팀원들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번 돈의 상당 부분을 전혀 기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줘야 하나?”

양측은 보상체계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도 의견 충돌을 빚었다. 하미드는 인덱스 벤처스 Index Ventures에서 동년배 일리아 푸시맨 Ilya Fushman을 영입했다. 그리고 그에게 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클라이너는 신경 쓰지 말고, 새 회사를 함께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들의 목표 중 하나는 (초기 단계 투자를 받은) 창업가들에게 클라이너의 성장 펀드가 후기 단계 투자도 지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키는 그런 확신을 주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양측은 많은 행정적인 업무에서도 갈등을 빚었다. 펀드 거버넌스와 채용 관행, 투자위원회 구성 방식 같은 문제들이었다.

지난해까지 이런 사내 분위기로 인해, 직원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고 상당수는 분노했다. 최고 벤처 캐피털리스트 순위에서 클라이너 파트너들은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미국 IT시장조사 기관 CB 인사이츠 CB Insights가 최근 발표한 세계 최고의 벤처 캐피털리스트 20인 순위에서, 클라이너 관계자는 8위에 오른 미커가 유일했다. 전 직원은 “정말 솔직히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그 순위에 신경을 쓴다”고 말한다. 또 다른 직원은 “새로 합류한 마문은 마리가 ‘보안관’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와서, 자신이 신임 ‘보안관’ 행세를 했다. 그녀가 왜 떠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미커는 작년 9월 회사를 떠났다. 그녀는 클라이너를 떠나, 후기 단계 비상장 기업들에 초점을 맞춘 투자사 본드 Bond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도전에 클라이너 팀원들이 동행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그녀의 오랜 파트너 무드 로가니 Mood Rowghani, 사모펀드사 워버그 핀커스 Warburg Pincus 출신의 노아 노프 Noah Knauf 파트너, 2001년부터 클라이너에서 근무했던 인사담당 임원 줄리엣 드 보비니 Juliet de Baubigny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하미드와 푸시먼, 그리고 소수의 다른 클라이너 투자자들을 남겨두고 떠날 예정이다. 남은 이들은 회사 명성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벤처 캐피털 회사의 분열은 결혼생활의 파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커(59)는 자신이 세운 투자사 본드의 자금 조달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클라이너에서 투자한 ‘자식’ 같은 기업들을 계속 돌보고 있다. 이혼을 하려는 부부들이 서류 작업을 전부 정리하지 못한 것처럼, 이 양측도 여전히 동거 중이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사우스 파크 사무실뿐만 아니라, 멘로 파크의 샌드 힐 로드에 위치한 오래된 클라이너 본사도 계속 공유하고 있다.

존 도어(67)는 클라이너의 회장으로 남아있다. 그는 더 이상 회사의 펀드투자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있다. 그는 최근 ‘중요한 것을 측정해라(Measure What Matters)’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신간에서 구글과 다른 기업들에 투자했던 경험과 ‘목적과 핵심 성과(Objectives and Key ResultsㆍOKRs)’를 중심으로 경영한 사례를 공유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미국벤처캐피털협회(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나쁜 감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미커가 수상축하 행사에서 그를 소개했다. 클라이너 출신 인사들도 다수 참석했다. 자칭 ‘가망 없는 낙관론자’인 도어는 청중들에게 “아이디어는 떠올리기 쉽다.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이기려면 팀플레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클라이너에 남아있는 도어의 후계자들은 실리콘밸리의 차세대 유망 기업을 찾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리플링 Rippling(직원 관리 소프트웨어 개발사), 어플라이드 인튜이션 Applied Intuition(모의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개발사), 프로펠 Propel(식료품 할인 구매권인 푸드 스탬프 관리앱) 등의 기업들에 투자했다. 그리고 공유가치를 의사소통하는 방식에 있어, 자신들의 회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최근 이 벤처 캐피털 회사의 파트너들은 야유회를 갖고, 어수선한 사내 분위기를 인정하듯 ‘하나의 팀, 하나의 꿈’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새 경영진은 또한 분기별 ‘전체 직원’ 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회사 실적을 더욱 투명하게 공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도어가 자신의 저서에서 신신당부했듯, 그들은 과거가 아닌 현재 무엇이 중요한지 파악하는 중이다.

안재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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