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부터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되며 직장 내 괴롭힘의 적용 기준과 범위를 두고 설왕설래하자 고용부가 1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어 몇 가지 예시를 제시했다. 피해자와 같은 처지의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괴롭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고용부의 설명에도 직장 내 괴롭힘 범위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계속된 데 따른 것이다.
개정 근로기준법과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매뉴얼을 보면 근무시간 외에 회사 밖에서 일어난 일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 ㅇ과장의 상사는 일과가 끝난 후 팀원들이 쓰는 모바일메신저에 자기 사정을 하소연하는 글을 올리고는 팀원들이 답을 안 하면 “왜 답을 안 하느냐”는 문자를 올리며 다그쳤다. 비록 온라인에서 벌어진 일이나 지위상 우위를 활용했기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이다. 반대로 근무시간 외의 일인데다 개인적 갈등이면 고통을 받았어도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하지 않는다. 회사 동료를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나 옛날 얘기를 하다 말다툼을 한 ㅂ씨의 경우는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다.
근로계약서나 취업규칙에 명시하지 않은 가욋일을 떠맡았을 때는 업무와의 연관성에 따라 괴롭힘으로 볼 수 있는지가 갈린다. 어린 시절 외국에서 자라 영어가 능숙한 ㅈ대리는 회사 선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업무시간에 몰래 회의실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회사에는 비밀로 했다. 선배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영어를 가르치지만 준비하는 데 부담이 됐다. 무역회사의 보조 담당 사원 ㅎ씨는 예상치 못하게 내일 거래처와 계약을 맺게 돼 서류를 꾸며달라는 팀장의 지시를 받고 갑자기 야근을 하게 됐다. 원래 하던 업무가 아니라 생소한 일이었다. ㅈ대리의 경우는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할 수 있지만 ㅎ씨는 성립이 어려운 사례다. ㅈ대리는 일반적으로 봐도 업무와의 관련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반면 ㅎ씨는 업무상 필요성을 고려할 수 있는 수준이다.
업무 성과를 높이기 위한 독려 혹은 질책은 업무상 적정 범위 내 행위로 볼 수 있다. 기업체를 중심으로 업무 관련 질책과 직장 내 괴롭힘 간 경계가 모호하다는 문제 제기가 많았던 부분이다. ○○은행의 ㅊ지점장이 실적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매일 부하직원의 성과를 점검한다 해도 다른 지점장과 동일한 방식이라면 직장 내 괴롭힘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격모독 수준의 폭언을 하거나 업무상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으로 질책을 가하면 괴롭힘이 될 수 있다. 파견·하청노동자의 경우 파견법과 관련 판례 등을 보면 파견업체를 쓰는 원청업체인 ‘사용사업주’와 그 소속 노동자와 파견노동자 사이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될 수 있다.
한편 고용부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첫날인 16일 하루 동안 전국 고용노동관서에 모두 9건의 진정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최태호 고용부 근로기준정책과장은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이 중 MBC 계약직 아나운서 사례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부는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내용을 반영하지 않은 사업장에 최장 25일의 시정기간을 줄 방침이다. 시정기간에도 취업규칙 제·개정을 하지 않으면 최대 5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