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2,000만 동포에게 허위 선생과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 선생은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도마 안중근)”
안중근 의사가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꼽았던 ‘대한제국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들을 만났다. 상투적이지만 그리움과 고통의 세월이 절절히 느껴지는 단어 ‘이역만리’.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을 공식 방문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18일(현지시간) 허위 선생의 후손들을 별도로 만났다, 아니 ‘모셨다’.
허위 선생의 손자 허게오르기(75)·블라디스라브(65)씨, 증손주인 예브게니아(46)·블라디미르(39)·세르게이(32)씨 등이 이 총리와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李총리 “제대로 모시고 있지 못해 죄짓는 마음”
이 총리는 “할아버지께선 애국지사 중의 애국지사”라며 “그런 분들의 희생이 있어 해방을 맞고 이만큼이나 살게 됐는데 그런 분들의 후손을 제대로 모시고 있지 못해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총리는 “할아버지께서 꿈꾸시던 독립 조국은 갈라진 조국은 아니었을 텐데 후손이 못나서 갈라져 있다”며 “일단 평화를 정착시켜가면서 우리 세대가, 아니면 다음 세대라도 꼭 하나가 되도록, 그 기반이라도 닦아 놓는 것이 우리 세대의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허게오르기씨는 먼저 “한국말을 할 줄은 알지만 서툴러서 러시아말로 하겠다”고 했다. 이역만리를 떠돌며 오랜 세월을 헤맨 탓에 한국어가 희미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어 속에 담긴 생각은 여느 한국인보다 올곧았다.
그는 “중앙아시아에 사는 모든 고려인이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며 “조국 통일이 평화적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게오르기씨는 “독일과 같은 방법으로 한국이 통일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조상이 바라던 하나의 나라, 통일이 빨리 이뤄지길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고국에서 잊혀져가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허게오르기씨는 “사실 지금 많은 사람이 기억을 못 하고 있다”며 “자라나는 어린이, 후손들이 허위 선생 같은 영웅이 계셨다는 것, 우리 역사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알게 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허위 선생의 증손주인 허블라디슬라브씨에게도 ‘우국지정(憂國之情)’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통일이 되어야만 진정한 독립운동이 끝을 맺는 것, 과업을 완료하는 것”이라며 “아직은 여전히 독립운동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그리고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
허위 선생의 역사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노골적으로 대한제국 숨통 끊기에 나섰다. 힘없는 나라이니 외교권을 내놓으라 했다.
고종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거부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에는 이미 일제의 편에 붙은 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무람없는 자들이 고종 몰래 도장을 찍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 아니 나라가 통째로 일제의 손아귀에 무기력하게 떨어졌다.
나라 잃은 분노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궐기했다. 13도 연합의병부대까지 결성한 이들은 1908년 서울진공작전을 결정했다. 서울의 일제통감부를 치기로 한 것이다. 경북 구미 태생의 왕산 허위 선생이 앞장섰다. 허위 선생은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일제의 병력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1908년 일본헌병부대의 기습을 받은 허위 선생은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허위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의 1호 사형수로 결정됐다.
선생의 순국은 후손들에겐 핍박받는 삶의 시작이었다. 일제의 억압을 피해 만주로, 다시 연해주로 도망을 갔다. 특히 허게오르기씨의 아버지이자 허위 선생의 4남인 허국씨는 가족과 함께 다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떠돌다 1960년대 들어 겨우 키르기스스탄에 정착했다. 모국의 언어가 희미해질 수 밖에 없는 삶의 궤적이다.
이 총리는 “허위 선생처럼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싸운 분들의 후손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정부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한 후 “자책감을 많이 갖는다. 저희의 크나큰 숙제라고 생각한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슈케크=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