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 재료 수출제재를 경제정책 대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가 반도체 소재·부품 개발에 특별연장근로 인정을 검토 중인 것과 같이 일괄적인 주 52시간 근로제 등을 전면 수정하고 규제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또 반도체 소재·부품 개발이 기초과학 육성부터 필요한 구조적 문제인 만큼 정부가 외교적 수단을 통해 글로벌 분업체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낙연 국무총리를 특사로 파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23일 특별 대담에서 “일본과 문제를 조속히 수습하는 것이 제일 급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한 전면적인 경제정책 전환이 시급하다”며 “당장 반도체 소재·부품 연구개발(R&D)을 주 52시간 근로제의 예외로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윤 전 장관은 이어 “소재·부품을 개발하려면 밤을 새워 일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없는데 주 52시간 근로제를 일괄 적용해서는 안 된다”면서 최저임금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데 누가 동의를 안 하겠느냐”며 “업종 등에 따라 차별화해야 현실성이 있는데 일괄 적용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역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등의 규제를 불화수소를 비롯한 국산 소재 개발의 걸림돌로 꼽았다. 권 부회장은 “화평법은 등록해야 하는 화학물질의 종류를 7,000개까지 늘려서 한 종류 검사를 받는 데 몇 천만원에서 몇 억원이 든다고 한다”면서 “중소기업에서는 화학물질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일본 정부의 반도체 등 소재·부품 3개의 수출규제 조치가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조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윤 전 장관은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1998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당시에는 유동성과 지불 능력의 문제였지 실물경제는 탄탄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우리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실물경제에 위기가 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윤 전 장관은 일본이 금융제재에 나서 돈줄이 끊어질 가능성을 들어 “금융위기가 겹쳐 복합위기가 될 소지가 있는 만큼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또다시 쓰라린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날 대담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국산 소재·부품 개발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문제인 만큼 정부가 나서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 입을 모았다. 윤 전 장관은 “동북아에서는 일본이 소재·부품을 만들고 한국이 이를 바탕으로 중간재를 만들면 중국이 조립해 완제품을 만드는 글로벌 분업체제가 형성돼 있다”며 “이제 와서 소재·부품에 매달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쓴소리를 했다. 특히 윤 전 장관은 “이번 사건을 발판으로 외교부가 나서 ‘동북아 경제공동체’ ‘한중일 경제협력체’ 등을 구상해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 내 압류된 일본기업 재산을 현금화하는 조치를 취할 경우 일본 경제보복이 격화되고 한일 경제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과거와 다른 입장에서 보복을 가하는 일본이 자발적으로 피해자에게 돈을 낼 가능성은 없다”며 “다시 일본에 구차하게 돈을 달라고 하지 말고 우리 정부와 기업이 주가 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이 총리 등을 특사로 보내 어느 정도 합의점을 만들어내고 우리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문제를 최종 해결하는 정상회담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