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언론에 재갈을' 광무신문지법

1907년 공포… 45년간 존속




1907년 7월24일, 이완용이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으로 나라를 팔아먹은 바로 그날 ‘신문지법’이 공포됐다. 전문 38조(이듬해 41조로 개정)로 구성된 이 법의 목적은 언론통제. 신문업 허가제와 사전검열, 정부의 발행금지권, 보증금 등을 법령에 담았다. 특히 황실 존엄 모독과 국헌 문란, 국제문의(외교상 국익) 저해를 금지하고 어길 경우 발행인과 편집인·인쇄인 처벌과 윤전기 몰수 조항까지 넣었다. 군대를 해산하고 경찰권까지 일제에 넘긴 한일신협약과 신문지법이 등장한 지 사흘 후 일제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 ‘보안법’을 만들었다. 결사 집회 억제보다 언론통제가 먼저라고 본 것이다.


이완용 친일내각이 공포한 제1호 법률이기도 한 ‘광무신문지법’은 통했을까. 그렇다. 유학파 등 지식인들의 취업과 기고가 각종 친일매체에 쏠렸다. 반대로 민족언론은 짓밟혔다. 동아일보는 걸핏하면 정간 조치를 당했다. 일제는 한반도 내 신문은 물론 해외에서 들여오는 신문에도 이 법률을 적용했다. 조선인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가리고 막은 것이다. 일제는 1919년까지 조선인에게는 단 한 건도 신문 발행 허가를 내주지 않은 반면 일본인들은 신문이나 잡지 발행 허가를 26건이나 받았다. 악법에서조차 차별정책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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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여겼던 이 법이 해방 후에도 7년이나 존속됐다는 점. 미 군정청은 폐지 여론에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이승만 정부는 언론단체들의 빗발치는 폐지 요구를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언론사 윤전기에 흙을 뿌리는 관제데모와 사적 린치를 일삼았다. 결국 야당이 국회 다수당을 차지한 후인 1952년 3월 국회 표결에서 85(찬성)대33(반대·기권 포함)으로 폐기됐으나 누가 반대했느냐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신문지법 폐기 이후 우리 언론환경은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다. 1980년대까지 당국의 사전검열에 걸린 기사가 삭제되거나 송충이 먹은 나뭇잎처럼 부분부분 먹칠이 된 신문이 독자들에게 배달됐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동아일보를 다스리려고 광고주들을 협박해 광고를 끊었다. 전두환 정권이 헌 칼처럼 휘두르던 ‘보도지침’의 존재도 1986년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의 폭로로 밝혀졌다. 요즘은 어떤가. 더 나빠진 것 아닌지도 모르겠다. 국회의원 일부가 일본 편을 들고 기자들이 자기검열에 걸려 편향보도를 일삼으며 기자 출신들이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가짜뉴스까지 판치는 세상이니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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