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위기를 겪게 마련입니다. 위기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며 미래를 도모할 것인가 그렇지 않고 불운을 탓하며 화병으로 몸져누울 것인가는 각자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500여년전 선비들의 삶에서 현명한 지혜를 얻을 수 있지요.”
<퇴근길 인문학수업-관계(백상경제연구원 엮음, 한빛비즈 펴냄)>의 필진으로 참가한 안나미(사진) 한문학자 겸 성균관대 초빙교수(한문학 박사)는 서울경제와 만나 조선시대 선비들이 맺은 세상과의 관계를 주제로 한 커리큘럼 ‘내 길은 내가 간다’에 담긴 메시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는 “권력에서 밀려나더라도 나를 지키기 위해 세상의 소용돌이에 휘둘거나 비굴하게 타협하지 않으면서 삶의 기준을 세우고 뚜벅뚜벅 걸어갔던 조선시대 선비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안 교수는 권필, 신흠, 서유구, 유몽인, 유형원 등 조선후기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대부의 위기극복 스토리를 소개했다. 이들은 정약용, 박지원, 허균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는 “조선 후기 격랑의 시대에 잘 나가다가 위기를 겪은 인물들로 자신의 고집을 꺾고 조금만 타협하면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스스로 비겁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면서 “주변 인물의 잘못으로 하루 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하고 가난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는 일이 ‘내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스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 매진하는 자세는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예조판서를 지냈던 신흠은 1613년 선조말기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된 후 무혐의로 인정받았지만, 삭탈관직 후 김포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불명예를 견디지 못하고 가혹한 형벌을 자청하기도 했지만, 아들이 부마였던 신흠은 유배지에서 ‘감지와(坎止窩)’ ‘초연재(超然齋)’ 등으로 거처에 이름을 정하고 스스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가 남긴 ‘상촌집’,‘야언(野言)’ 등은 힘든 시간을 견디며 불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슬기로움을 읽을 수 있다. 안 박사는 “신흠은 자신을 스스로 가둬놓고 공부에 몰입했다. 주변에 피해를 줘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중국의 상수학(수학) 관련 책을 수입해 조선에 맞는 상수학을 공부하는 등 유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농사에 뛰어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쓴 서유구도 있다. 안 박사는 “서유구는 과거에 급제한 후 전도유망한 인재로 떠올랐지만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 옥사에 연루되어 집안이 몰락하는 바람에 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면서 “하지만 서유구는 그동안 편안하게 먹고, 자고, 입었던 모든 것이 누군가의 수고에 의한 것이라는 데 깊은 깨달음을 얻어 농사에 직접 뛰어들었다. 마흔 둘이라는 나이에 쉽지 않은 선택”이라면서 “생업으로 시작한 농사였지만, 그는 선비로서 농사를 바라보며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농업의 효율성 등을 고민하면서 백과사전을 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몽인, 유형원 등 모두 현재의 처지에서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 방법을 찾은 사람들”이라면서 “유형원처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제도가 시급하다고 진단하고 ‘반계수록’집필에 매진하는 등 각자 뜻을 세우고 공부하며 삶을 이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좋아해 ‘걸어 다니는 옥편’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던 안 박사는 “수학도 좋아했지만,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렸던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을 읽으며 한문을 평생의 공부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서 “공부가 가장 쉽지는 않지만 제일 재미있는 일”이라면서 학자로서의 삶에 만족했다. 한문은 옛날 고리타분한 이야기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옛날 이야기는 맞지만 고리타분한 학문이 아니라 요즈음 시대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사람에게 보물 같은 창고”라고 강조했다. 한문학은 이미 많이 알려진 학문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이어 “아직 소개되지 않는 콘텐츠가 더 많다. 유형원의 ‘반계수록’ 조차 완역이 되지 않았을 만큼 잠자고 있는 고전이 가득하다”면서 “과거에 사람들의 희로애락은 시대가 바뀌어도 본질은 같다. 원형을 이해한다면 관점을 바꿔 무궁무진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고전이 전하는 메시지를 곱씹어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면서 활짝 웃었다. /글·사진=장선화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 indi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