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의 대(對)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을 앞두고 1일 관계부처 장관을 긴급 소집해 135분간 대응책을 논의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가능한 모든 조치를 논의하고 준비하고 있다”면서도 회의에서 오간 구체적인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한일 양국이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민감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패를 먼저 공개하기 조심스럽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이날 소집된 긴급 관계부처 장관 회의에 국방부 장관과 국가안보실장 등 국방·안보 당국자들이 자리한 만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에 대한 논의도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정부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이견이 있으나 지소미아는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할 가장 확실한 카드로 꼽히고 있다.
한일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미국은 외교적 분쟁중지협정(standstill agreement) 서명 검토를 한일 양국에 촉구했지만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와 관련해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일본이 좀처럼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고 밝혔다. 미국의 이 같은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한일 갈등의 원만한 합의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2일 오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일본 각의 결정이 나오면 당일 오후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를 개최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임시 국무회의에서는 한시적으로 특정 수입품목에 관세를 인하하는 ‘할당관세’ 적용안이나 연구개발(R&D) 관련 인허가 지원 개선안 등 정부 대책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추가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올지 여부도 주목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이미 수일 전부터 내각과 안보실에 종합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해왔다”고 전했다.
정부는 국내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는 동시에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을 통해 일본 수출규제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선명히 드러낼 계획이다. 이날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장관회의 참석 차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유명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회의에서 일본의 수출규제가 부당할 뿐만 아니라 RCEP의 기본정신에 어긋나고 나아가 역내 공급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적극 설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또한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는 결정을 내린 직후 ‘반도체 등 부품·소재·장비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해당 계획에는 일본에 의존하던 품목을 국산화하기 위한 장단기 프로젝트가 반영돼 있다. 단기 대책의 일환으로 신성장동력과 4차 산업혁명, 안전·환경 관련 시설 투자 등 기존 R&D 세액공제 대상에 불화수소 제조 기술 등 일본 수출규제 품목 관련 분야를 추가할 예정이다. 아울러 확보한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국산화가 시급한 분야에 집중 투자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정부는 국내 기업의 소재·부품 관련 해외 인수합병(M&A)을 독려하기 위해 세제 혜택을 검토하고 있다. M&A 또는 합작회사를 만들면 오랜 R&D 기간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만큼 빠르게 일본산 소재·부품 대체가 가능하다.
장기적으로는 관련 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과 수요기업인 대기업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어 소재 국산화에 나선다. 그동안 대기업이 검증된 일본 제품만을 납품받으면서 판로를 찾지 못해 고사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외적으로는 WTO 제소를 통해 외곽 압박의 강도를 높일 예정이다. 통상당국은 이미 WTO 제소를 위한 실무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가 본격화하면 일본이 지난달 발표한 3대 품목 수출제한 조치와 함께 WTO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지윤기자 세종=김우보기자 ya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