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1937년 상하이 전투

日, 중국 수렁에 빠지다

상하이 방어전에 투입된 중국군이 독일식 기관총진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위키피디아상하이 방어전에 투입된 중국군이 독일식 기관총진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1937년 8월13일 상하이, 일본 해군육전대 1개 분대가 중국군에 총을 쏘았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총성은 오후2시 들어 전역으로 퍼졌다. 100만명이 넘는 군대끼리 혈전을 치른 ‘상하이 전투’가 터진 것이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105일의 전투에서 중국군은 약 28만명이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의 전사 1만9,360명, 부상 7만9,057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상하이 전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중국 측은 실패한 작전으로 보는 반면 대만은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어들인 전투’로 여긴다.


후자의 견해가 다소 우세한 가운데 분명한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상하이에서 만만찮은 중국군과 싸웠던 일본군은 중국의 수도인 난징으로 진격해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날이 선 일본도로 사람의 목 치기 시합을 하고 여인들을 성폭행하며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양민 30만명이 광기 어린 일본군의 총칼에 죽어 나갔다. 둘째, 일본의 계산이 빗나갔다. ‘개전 후 3개월이면 중국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군부의 오산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전투 초반은 중국이 우세해 보였다. 5만여 중국군이 1만여명의 일본군을 포위하는 형국으로 진행됐으니까. 전투 이틀째인 14일 중국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총동원하고 3척의 구축함과 순양함으로 양쯔강을 틀어막았다. 국민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결사항전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과 정치·외교·상업의 중심지인 상하이를 잃을 경우 대일전쟁 수행능력 상실로 이어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중국군은 상하이 전투에서 큰 대가를 치렀다. 소총과 경기관총·박격포를 겨우 생산하는 공업력으로 무리하게 건조한 구축함과 순양함을 모두 잃었다. 미국에서 들여온 전투기와 독일제 폭격기 등 공군 전력도 상하이 전투를 치르며 사라졌다.

비록 졌어도 중국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봤다. 국민당 군대의 분전에 봉착한 일본은 끝없는 증원으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이겼으나 종국에는 모두 잃었다. 일본 군대가 중국에 발이 묶이지 않았다면 2차 세계대전의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극동에서 소련의 배후를 칠 수도, 미국에 보다 확실한 타격을 가했을 수도 있다. 중국 수렁에 빠진 일본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점령지 곳곳에 세워졌던 친일 괴뢰정부 부역자들은 민족반역자로 처벌받았다. 오늘날 일본은 침략기와 다를까. 글쎄다. 난징대학살도 조선인 위안부와 강제징용도 다 ‘조작’이란다. 오산을 거듭한 끝에 패망한 조상들과 참 많이 닮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