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관점]범용 탈피·핵심소재 개발 특화...'펠리컨 경제' 생태계 구축해야

[소재 ·부품 R&D 지원사업 성과 내려면]

개발 中企-대기업 공동 R&D·의무구매 등 실질대책 부족

20여년간 소재·부품 개발에 거액 투자했지만 상용화 부진

불나방처럼 연구비만 타먹으려는 기업·연구자 등 경계 필요

중기 핵심인력 양성·소재장비 개발·측정기술 지원도 중요





소재기술 국산화가 핵심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롯데정밀화학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소재 연구개발(R&D)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제공=롯데정밀화학소재기술 국산화가 핵심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롯데정밀화학 연구원이 실험실에서 소재 연구개발(R&D)에 몰두하고 있다. /사진제공=롯데정밀화학


“그간의 ‘가마우지’를 미래의 ‘펠리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2년가량 일본 경제산업성에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있는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5일 일본의 경제도발에 맞선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1988년 일본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는 ‘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한국 경제를 조롱조로 가마우지 신세에 비유했다. 가마우지(한국)는 물고기(수출)를 잡아도 끈에 묶인 목을 어부(일본)가 조르면 뱉어내야 한다. 반면 펠리컨은 먹이를 잡으면 부리 주머니에 담아 새끼에게 먹인다.

일본의 경제도발을 계기로 ‘가마우지 경제’에서 ‘펠리컨 경제’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과제가 떠올랐다. 정부는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 등 6대 분야에서 핵심품목 100개를 선정해 7조8,000억원의 연구개발(R&D) 예산을 투입, 5년 내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자립을 꾀하기로 했다. 독자기술 확보가 시급한 20개는 1년 내, 나머지 80개는 5년 내 공급 안정화를 이루기로 했다. 연 4%가량인 소재·부품 R&D 예산을 대폭 늘리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하면 감세하고 수도권에 입지를 우선 배정한다. 범정부 소재부품장비위원회도 가동하기로 했다. 내년 대학과 정부 출연연구소, 기업에 지원하는 R&D 예산도 올해보다 약 1조5,000억원 늘린 22조원가량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와 다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일본에 부메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지난 20여년간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한 R&D 투자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은 2001년 이후 생산과 수출이 각각 3배, 5배 늘어나며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범용제품 위주로 기술개발이 이뤄졌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에 출석해 “전문가들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소재의) 국산화에 20년이 걸린다’고 한다. 현재 소재는 50%, 반도체 장비는 20%가량 국산화돼 있다”고 보고했다. 소재 기업인 솔브레인의 박영수 부사장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단기적 성과에 치중하다 보니 개발 난도가 높은 연구를 하지 않았다. 장기 R&D에 소홀했다”며 “정부가 소재 국산화에 R&D 자금을 투자할 때 집행방식에 대한 점검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소재·부품의 본격적인 R&D 계획을 처음 내놓은 것은 2001년 ‘제1차 부품·소재발전 기본계획’이다. 이때는 소재보다 부품이 우선이었다. 그 결과 부품 산업에서는 일본에 대한 무역역조를 적잖게 탈피했으나 소재 분야는 그렇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2009년 말 ‘부품·소재 경쟁력 제고 대책’을 다시 세우고 2010년부터 “세계 10대 핵심소재를 키워 세계 4대 소재 강국으로 거듭나겠다”는 WPM(World Premier Material) 사업을 야심 차게 시작한다. 2011년에는 소재를 앞세운 ‘소재·부품 미래비전 2020’을 수립했다. 전략적 핵심소재개발사업, 핵심방산소재개발사업, 벤처형 전문소재개발사업, 수요자연계형 소재부품개발사업, 투자자연계형 기술개발사업 등을 잇따라 추진한 것이다.

WPM 사업의 경우 삼성·LG·포스코 등 대기업 주도로 중소기업·대학·출연연 등 200곳가량을 참여시켜 스마트강판 소재, 나노카본 복합소재 등 10개 사업단을 출범시켰다. 올해 사업이 종료되는데 그동안 투입된 예산만도 6,000억원을 넘는다. 산업부와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은 지난해 “소재 기술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러 많은 특허와 고용창출이 이뤄지고 소재 강국인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10여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플렉시블 디스플레이용 기판소재사업단(2017년 종료)은 일본산 소재에 의존하던 폴리이미드를 국산화하고 양산에 들어간다고 했으나 일본의 도발에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초경량 마그네슘소재사업단은 철강·알루미늄보다 가볍고 재활용률이 높은 마그네슘 소재를 개발했다며 홍보했지만 사업을 주도한 대기업은 사업을 재검토하고 있다. 슈퍼사파이어단결정소재사업단은 고순도 알루미나분말 소재의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일제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수요가 창출되지 않아 사업화가 이뤄지지 않은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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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소재부품기술개발사업’ 평가보고서를 보면 초경량마그네슘소재사업단과 고성능이차전지소재사업단·프리미엄케톤소재사업단 등은 사업이 3~4년 정도의 초기 단계라고는 해도 상용화 실적이 전무했고 당초 계획 대비 민간투자도 7% 미만에 그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연구책임자였던 이태근 KISTEP 예비타당성조사2센터장은 “2010년을 기점으로 R&D 투자방향을 부품 위주에서 당시 무역역조가 심각하던 소재로 틀었다”며 “사업들이 주로 기업 지원 등 산학연 역할분담에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수요자 연계형 소재부품개발사업도 개발 중소·중견기업과 수요자인 대기업 간 공동 R&D 수행과 의무구매 등 실질적 대책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소기업이 개발에 성공해도 사업화 성공률이 낮아지는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히든챔피언이 되려면 대기업의 횡포가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현민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의 생산공정에서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가 필요하다”며 “대·중소기업을 연결하는 조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국회에서 대기업에 대한 일부 R&D 지원을 질타하는 문제는 대·중소기업 간 R&D 연결고리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문제는 R&D 인력의 편중을 들 수 있다. 소재는 몇몇 기반 소재를 제외하고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특징이어서 중소기업이 많이 담당하는데 박사급 연구자들이 대학·연구소·대기업에만 몰리고 중소기업에는 태부족이다. 설령 대기업과 공동 R&D를 해도 기술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수 소재 개발은 물론 상용화를 위한 소재·장비 개발 지원도 중요하다. 측정 정밀도가 높지 못하면 고품질의 소재 개발이나 신뢰성 검증이 힘들다는 점에서 측정기술 투자도 필요하다. 신소재를 개발해 부품이나 모듈·시스템으로 발전시킬 때 금형·용접·열처리 등 뿌리 산업이 튼튼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지만 해당 기업들은 영세하기 그지없다.

전문가들은 그동안의 소재·부품 육성책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나’ 하는 징비록을 써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R&D 투자를 늘리는 방향은 옳지만 그동안의 투자 성적표를 냉철히 분석하고 소재·부품 경쟁력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급증하는 소재 등의 R&D 예산을 노리고 불나방처럼 달려들 기업과 교수·연구원들을 양산할 우려도 있다. 한 소재 중소기업 R&D 책임자는 “소재 R&D 투자 분위기에 들떠 눈먼 R&D 자금을 쫓아다닐 연구자를 감안해 실효성 있는 R&D 기획과 자금 배분, 평가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산업 생태계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부가 일본의 경제도발이 발생하기 전인 올 3월 ‘소재산업혁신기술개발사업’이라는 5조원 규모의 초대형 소재 R&D 프로젝트(7년)의 예타를 신청해 현재 KISTEP이 검토하고 있는데 적잖은 투자금이 예타 면제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이 프로젝트에는 WPM 사업 연장 건도 포함돼 있다. 전직 한 정부출연연구원장은 “WPM 사업 등 그동안의 소재·부품 R&D 사업을 여러 측면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며 “공무원들이 성과만 포장하려고 하지 제대로 책임지는 문화는 없다”고 비판했다.

소재 강국인 일본의 경우 1980년대부터 투자위험이 커 민간이 하기 힘든 신소재 분야의 R&D를 중점 지원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부터 핵심 소재·부품 등의 기반 산업에서 중소기업의 R&D 능력을 강화하고 중소 소재 기업과 조립 대기업 간 협력을 확대했다. 박 책임연구원은 “일본은 세계 시장의 50% 이상 차지하는 소재를 다수 키워나갔지만 우리는 지난 10~20년간 범용소재에 치중한 측면이 있다”며 “파급효과와 시장이 큰 기술에 장기간 충분히 지원해 기초·원천 성과를 만든 뒤 상용화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했다. 반도체 장비 업계의 신화로 통하는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일본의 수출규제는 우리의 4차 산업혁명 속도를 늦추겠다는 심산”이라며 “정부와 대기업이 리스크를 지지 않는 풍토에서 벗어나고 기술가치를 보호해야 이번 위기도 극복하고 혁신성장도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은 “대학이나 출연연에서 소재·부품·장비를 연구해도 논문 쓰기 쉬운 새로운 분야를 원하지, 산업화가 필요한 전통 주제는 안 하려 한다”며 “중소·중견기업이 소재·부품·장비를 개발해도 대기업이나 대학·연구소에서 시험적으로 잘 써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

고광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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