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이사람]청각장애 테니스 선수 이덕희 "들을 수 없지만 꿈꿀 수는 있어...우상 페더러와 붙어 봐야죠"

돌 무렵 청각장애 알게 된 부모님

"장애는 불편일 뿐 부끄러움 아냐"

일반 어린이집 보내 구화 가르쳐

일곱 살 때 테니스라켓 처음 잡아

몇살 위 형들 심심찮게 이겨 주목

귀 대신 눈으로 상대 움직임 파악

손바닥 나무껍질 되도록 맹연습

행운처럼 다가온 ATP본선행 티켓

세계120위 선수 2대0으로 누르고

청각장애인 최초로 단식 본선 승리

우승한 것도 아닌데 칭찬 쑥스러워

장애인들, 주변 말에 흔들리지 말고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가졌으면

청각장애 선수로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사상 첫 승리를 거둔 이덕희 선수./성남=오승현기자청각장애 선수로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사상 첫 승리를 거둔 이덕희 선수./성남=오승현기자



“아, 꿈이었구나….”

청각장애 3급의 이덕희(21·서울시청)는 종종 ‘들을 수 있는 꿈’을 꾼다. “친구랑 자유롭게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데 ‘탁’ 하고 깨요. 그제야 꿈이었다는 것을 알죠.”


이덕희는 테니스로 꿈의 무대인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에서 요즘 가장 뜨거운 선수 중 하나다. 지난 20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전해진 ATP 투어 윈스턴세일럼 오픈 단식 본선 1회전 승리 소식은 ATP 투어 홈페이지 메인화면을 장식했다. 미국 USA투데이·CNN·CBS, 영국 BBC, 프랑스 르파리지앵, 호주 뉴스닷컴, 스페인 아스 등 세계 주요 매체들도 비중 있게 다뤘다. 청각장애 선수가 ATP 투어 단식 본선에서 승리한 것은 이덕희가 역사상 처음이다.

최근 경기 성남의 YnS테니스아카데미에서 이덕희를 만났다. 전담 코치인 윤용일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이덕희는 경기나 연습 중 보호대를 차는 양 손목만 빼고는 온통 구릿빛이었다. 악수하며 잡은 오른손은 크고 작은 굳은살로 가득해 나무껍질 같았다. 3월부터 이덕희를 맡은 윤 코치는 “테니스 선수 중에서도 특히 굳은살이 많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덕희는 태어날 때부터 귀가 잘 안 들렸다. 돌 무렵 이를 발견한 부모는 이후 청각장애 특수학교 유치부에 보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일반 학교로 전학 보내 일반 중고교를 나오게 했다. 어머니 박미자씨는 “우리 가족은 (이)덕희가 장애를 부끄러움이 아닌 약간의 불편함으로만 생각하고 비장애인들과도 잘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서 유치부 때도 오전에는 특수학교, 오후에는 일반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수화 대신 구화(口話)를 가르쳤다”고 돌아봤다.

테니스 라켓은 일곱 살 때 처음 잡았다. 테니스 선수인 사촌 형을 따라간 코트에서 첫날부터 테니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덕희는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신사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운동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며 “이후 한 단계씩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매니지먼트사 직원이 입 모양을 알아보기 쉽게 질문을 전달하고 이덕희의 답변을 직원이 다시 옮기는 식으로 이날 인터뷰는 진행됐다.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덕희는 몇 살 위의 형들을 주니어 대회에서 심심찮게 이겼다. 2014년에 한국 선수 역대 최고인 세계 주니어 랭킹 3위에 올랐고 한국 최연소로 퓨처스 대회에서 우승했다. 2016년의 ATP 랭킹 톱200 진입 역시 한국 최연소 기록이었다. ATP 투어보다 한 등급 낮은 챌린저 대회에서 2016년과 2017년 한 차례씩 준우승한 뒤로는 한동안 슬럼프를 겪었다. 열아홉에 ATP 랭킹 130위를 찍을 정도로 기대를 모았으나 기량 향상에 정체가 왔고 테니스 선수로는 작은 175㎝의 키로는 한계가 있다는 분석도 흘러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행운이 찾아왔다. 대기순번 앞순위 선수들이 잇따라 출전을 포기하면서 투어 대회 본선 티켓을 처음으로 따낸 것이다. 일생일대라 할 만한 기회를 이덕희는 놓치지 않았다. 첫 출전인데도 자신보다 랭킹이 훨씬 높은 세계 120위 선수(이덕희는 당시 212위)를 2대0으로 꺾었다. 키 차이가 20㎝ 이상 나는 41위 강호와의 2회전(1대2 패)에서도 첫 세트를 따내는 등 잘 싸웠다. 지금은 왼손가락 부상으로 몇 주간 강제휴식을 취하게 됐지만 208위인 현재 랭킹을 부지런히 끌어올려 내년 1월 호주 오픈을 통해 그랜드슬램 대회 본선에 데뷔한다는 목표는 변함이 없다. 지독한 침체기 때도 정규훈련 시작 전에 이른 아침부터 혼자 코트에 나가 스트로크 연습을 하며 ‘한 번씩 이렇게 슬럼프가 오는구나’ 하고 넘겼던 이덕희다. 지난해 호주 오픈 4강 신화를 쓴 정현을 과거에 지도했던 윤 코치는 “그라운드 스트로크로는 100위 내 진입에 부족함이 없다. 발리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며 “서브 게임을 지키는 능력과 네트 플레이 등을 조금만 더 보완하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이덕희를 평가했다.



이덕희는 청각장애 3급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머니 박씨에 따르면 사실상 2급에 가깝다.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심판의 콜을 확인하지 못해 멈추지 않고 경기를 이어나갈 때도 더러 있다. 서브 에이스인데 모르고 세컨드 서브를 넣기도 한다. 이런 핸디캡을 악용하는 상대도 가끔 있다고 한다.

듣지 못하는 대신 시력이 좋다. 이덕희는 “시력은 양쪽 다 1.5다. 톱스핀인지 슬라이스인지 공의 모양을 보고 구분한다”고 했다. 윤 코치는 “공이 네트에 맞고 넘어올 때는 보통 소리를 듣고 다음 동작을 가져가는데 (이)덕희는 미세한 네트의 움직임을 눈으로 판단해낸다”며 “청각 의존도가 높은 테니스를 듣지 못하면서도 곧잘 한다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들을 수 있다면 가장 듣고 싶은 소리가 뭐냐고 물었다. 이덕희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장 듣고 싶다. 대화하고 싶다”고 답했다. “테니스를 하는 게 내 삶이라서 다행이고 좋다” “테니스를 일찍 만난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던 그였지만 테니스공 소리보다 간절한 것은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소리인 것 같았다.



소리에 대한 갈망은 당연하지만 이덕희는 평소 불편함을 잊고 산다. 라켓을 잡으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오래 본 주변 사람들과는 구화로 소통이 꽤 원활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투어 첫 승이 국내외에서 크게 주목받자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우승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칭찬해주는 거죠?” 어머니 박씨는 “(이)덕희는 자기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저나 애 아빠, 덕희 동생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덕희는 과거 장애인 체육계에서 활동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았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장애인들과 겨루면 우승도 훨씬 더 많이 할 가능성이 크고 패럴림픽 메달로 꽤 많은 연금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덕희는 그러나 “어릴 때부터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1위를 하는 게 목표였다. 이번 투어 대회 경험을 통해 랭킹이 높은 선수와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8년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자동차 등 스폰서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덕희는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아시안게임 남자단식 사상 한국 선수로 12년 만에 메달(동메달)을 따내는 기록도 남겼다.

관련기사



질문과 답변이 전달되는 사이마다 이덕희는 벽에 붙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는 “그랜드슬램 대회 본선에서 우상 페더러와 경기하는 상상을 한다”고 했다. 어린 시절 “괜히 안 들리는 척하는 것”이라는 조롱이 가장 가슴 아팠다는 그는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하자 “주변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흔들리지 말고 기죽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남=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He is



△1998년 단양 △2013년 남자프로테니스(ATP) 최연소(만 14세11개월) 시니어 랭킹 포인트 획득 △2014년 주니어 랭킹 3위 △2014~2017년 퓨처스대회 열한 차례 우승 △2016년 대만 가오슝 챌린저 준우승 △2017년 서울 챌린저 준우승 △2017년 ATP 랭킹 130위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단식 동메달 △2019년 ATP 투어 윈스턴세일럼 오픈 본선 1회전 승리



나달·조코비치도 반한 ‘스타들의 ★’

이덕희(21·서울시청)는 ‘스타들의 스타’다. 현재 남자단식 세계랭킹 1·2위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와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든든한 응원군이다.

시작은 나달이었다. 지난 2013년 만 15세도 되기 전의 이덕희가 일본 쓰쿠바 퓨처스(챌린저 아래 등급의 대회) 본선 1회전에서 승리, 남자프로테니스(ATP) 성인 랭킹 포인트를 처음 따냈을 때였다. 나달은 소셜미디어에 “이덕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항상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적었다. 얼마 뒤 방한해서는 이덕희를 직접 만나 “듣지 못하는 것은 테니스에서 큰 단점인데 강한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가 주니어와 프로 선수들은 물론 사회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격려했다. 2014년 프랑스 오픈을 앞두고는 이덕희를 초청해 함께 훈련하기도 했다.

지난 2014년 프랑스 오픈이 열린 파리 스타 드 롤랑가로에서 라파엘 나달(오른쪽)과 훈련한 뒤 기념촬영을 하는 이덕희.    /사진제공=S&B컴퍼니지난 2014년 프랑스 오픈이 열린 파리 스타 드 롤랑가로에서 라파엘 나달(오른쪽)과 훈련한 뒤 기념촬영을 하는 이덕희. /사진제공=S&B컴퍼니


조코비치와는 2015년 윔블던 당시 함께 훈련했다. 조코비치는 “주니어 단식에서 역전승하는 모습을 봤다. 장애를 이겨내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칭찬했다. 앞서 그해 호주 오픈 때 이덕희는 조코비치와 대회 홍보영상도 찍었다.

이번 ATP 투어 대회 첫 승 소식에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인 앤디 머리(영국)도 격려 릴레이에 동참했다. 그는 “만일 내가 헤드폰을 쓰고 경기한다면 공의 스피드나 스핀을 파악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경기에서 청각이 담당하는 역할이 매우 크기 때문에 듣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불리한 조건”이라며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이런 경기력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이덕희는 도미니크 팀(4위·오스트리아), 니시코리 게이(7위·일본), 2000년 말 세계 1위까지 올랐던 구스타보 쿠에르텐(브라질), 최강희 축구감독 등 수많은 유명 인사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응원해준 것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랜드슬램 대회 본선을 누빈다는 것 말고 또 다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덕희는 “각계의 응원 메시지와 ‘할 수 있다’는 팬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영광스럽고 감동적”이라며 “더 열심히 해 세계 무대에 자리 잡고 싶다. 그리고는 저한테 관심을 가져준 현역 선수들을 반드시 코트에서 만나 감사했다는 말을 직접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양준호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