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1774년 1차 대륙회의

미국 독립의 엔진 가동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헨리 클레이의 연설이 나온 1차 대륙회의. /위키미디어‘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헨리 클레이의 연설이 나온 1차 대륙회의. /위키미디어



1774년 9월5일 영국의 북미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13개 식민지 가운데 작고 거리가 먼 조지아주를 제외한 12개 주에서 56명이 모였다. 영국 식민지라는 공통점만 있었을 뿐 독자적인 행정 구조와 법률·화폐를 갖고 있던 이들이 모인 이유는 영국의 분노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영국 의회는 1774년 4월 더 이상 참지 않겠다며 강압법 5개 조문을 제정, 북미 식민지를 짓눌렸다. 영국이 강요법을 만든 도화선은 보스턴 차(茶) 사건. 세금 인상에 저항하는 식민지인들이 동인도회사의 선박 3척을 공격해 42톤에 이르는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리자 대식민지 강경책에 나섰다.


영국이 제정했던 ‘강압법(참을 수 없는 법)’은 가혹했다. 보스턴 항구 봉쇄와 배상금 요구, 군인 숙식법(식민지 주민에 대한 숙식 요구권), 퀘벡에 중앙정부 수립 후 식민지 제어, 매사추세츠 규제법으로 식민지를 누르는 한편으로 영국은 4,000명의 군대도 추가로 보냈다. 대책 협의를 위해 모였지만 식민지 대표들의 견해는 조금씩 달랐다. 영국과 유대를 강화하자는 온건보수파에, 당장 전쟁을 선포하고 독립을 선언하자는 과격파도 있었다. 57일간 이어진 토론 결과 식민지 대표들은 강압법 반대 결의문을 채택하고 식민지의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10개 조항의 요구 문서를 런던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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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대표들은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확대하고 2차 회의도 소집될 것이라는 으름장도 놓았다.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해 각 주가 민병대를 준비하고 조직하는 등 군사적 대비를 하라는 권고안도 잊지 않았다. 영국은 식민지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군대를 보냈다. 결국 1775년 4월 렉싱턴에서 식민지 민병대와 영국군의 충돌이 일어나고 식민지 12개 주는 5월 필라델피아에서 2차 회의를 열었다. 처음에는 ‘국왕 폐하에게 보내는 탄원서’부터 결의했던 2차 회의는 5년 10개월 동안 독립선언과 전쟁, 의회 성립까지 숨 가쁘게 달렸다. 대륙회의라는 명칭도 이때 생겼다.

영국이 ‘더 이상 참지 못해’ 제정한 강요법을 ‘못 참겠다’고 맞선 식민지의 투쟁은 결국 미국의 탄생을 낳았다. 1차 대륙회의가 단추를 제대로 끼운 덕분이다. 경제학과 수학의 접목을 시도했던 학자 출신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대로 온건한 정책을 썼다면 영국은 식민지를 지켰을까.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강조한 것처럼 비용이 많이 드는 식민지를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앞섰던 영국은 요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로 몸살을 앓는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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