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바도비체. 내년이면 탄생 100주년인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년)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작은 마을은 인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한산했다. 때마침 일요일이라 모두 성당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다고 한다. 성인의 탄생지인 이유도 있겠지만 인구 3,800만 명 중 97%가 가톨릭 신자라는 폴란드 사람들의 신앙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소련의 지배하에서도 신자가 꾸준히 증가하며 동유럽 최대 가톨릭 국가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생가
내년 탄생 100주년 맞아 신자로 북적
매일 기도 올리던 소박한 식탁에 숙연
◇‘폴란드인의 자부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먼저 2014년 박물관으로 새 단장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생가부터 찾았다. 어린 시절 카롤 보이티와(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의 탄생부터 성장기, 교황 시절 터키인에게 저격을 받은 후 그를 용서하는 모습 등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장면들을 쪼개 펼쳐놓은 듯 전시돼 있다. 곳곳에 전시된 요한 바오로 2세의 일생을 비롯해 사목활동 등은 무한한 종교의 힘과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모가 가난해서 2층의 방 2개에 세 들어 살았다는 생가는 매우 단출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모여 앉아 묵상했던 식탁과 매일 기도를 올렸던 기도대 등은 소박하고 아담해 오히려 경건함과 성스러움을 더했다. 식탁에 앉으면 바로 그가 첫 영성체를 한 ‘성모 마리아 바실리카(대성전)’가 눈에 들어온다. 그는 어린 시절 이곳에 앉아 성당 벽면의 해시계 그림자를 바라보며 영성을 키웠다고 한다. 특히 식탁 위에 놓인 ‘시간은 흐르나 영원함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문구를 보고 있노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상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방한을 두 번이나 했을 정도로 한국과 인연이 각별하다. 1984년 역대 교황 가운데 처음 방한했을 때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입을 맞췄고, 내한 인사로 논어의 구절인 ‘벗이 있어 먼 데로 찾아가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낭독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9년 두 번째 방한 당시에는 남북한의 화해를 바라는 평화 메시지를 전했다. 생가 박물관에도 한국과의 인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방문한 연도와 함께 한국에서 가져온 흙이 전시돼 있다.
야스나고라 성 바오로 수도원
스웨덴 침략 수도사·주민 기도로 버텨
‘검은 성모 성화’ 보러 年 500만명 순례
◇‘폴란드의 영적 수도’로 불리는 수도원=바도비체를 떠나 야스나고라 성 바오로 은수자회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이 위치한 쳉스토호바 시내 역시 텅텅 비었다. 반면 성당 안은 미사를 봉헌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관광객들도 넘쳐났다. 무려 120명의 수사가 생활하는 이 수도원에는 연간 500만명에 이르는 순례객들이 방문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검은 성모 성화’ 때문이다.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전쟁인 30년전쟁(1618∼1648년) 당시 수도원이 스웨덴 침략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수도사들과 주민들이 기도를 바치자 성화가 기적을 일으켜 수도원을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성화에는 오른쪽 뺨에 두 줄의 상처가 나 있다. 이는 체코 출신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던 기독교 교파인 ‘후스파’가 수도원을 습격해 성물들을 약탈했던 당시 생긴 상처라고 한다. 주변국의 침략, 공산화 등 숱한 시련에도 신심을 버리지 않았던 폴란드인의 운명과 의지가 담겨 있는 듯해 숭고함을 더한다.
소금광산
지하 9층 327m 깊이에 방 2,000여개
죽음 마주한 광부 神에 대한 믿음 새겨
◇종교의 힘과 인간의 염원이 느껴지는 소금광산=24일에는 폴란드 남부 비엘리치카의 소금광산을 방문했다. 1966년까지 소금 채굴이 이뤄졌던 이 광산에서는 종교의 힘과 이를 따르는 인간의 힘과 염원, 폴란드인의 신심, 노동자들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광산 내 곳곳에 설치된 성당에서는 신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무력함과 숭고함이 모두 느껴졌다.
기자가 편한 길로 내려가는 데도 지하로 갈수록 불안해지고 숨을 쉬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당시 광부들은 어떻게 공포감을 이겨냈을까 싶었다. 광산은 지하 9층의 327m 깊이까지 개발됐다고 한다. 일반 관광객이 볼 수 있는 곳은 지하 64~135m다. 광산 안에는 소금을 파내 생긴 2,000여개의 방이 있고, 이 모든 방을 연결하는 복도의 길이는 200㎞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전기도 없고 기계도 변변치 않던 시절 사람의 힘만으로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광산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광산 안에는 ‘성 안토니오 성당’ ‘성 십자가 성당’ ‘성녀 킹가 성당’ 등을 비롯해 가장 유명한 방문자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를 기리며 만든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방’, 광산에서 가장 오래된 전설인 킹가 공주의 이야기를 조각으로 묘사해 조성한 ‘전설의 방’ 등 화려한 볼거리가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배어 있는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죽음과 항상 마주하며 일했던 폴란드 광부들에게 신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문득 드는 의문이었다./글·사진(폴란드)=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