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이 좁고 불확실해 많은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기업들이 데스밸리에 놓여있습니다. 이용자 저변을 넓히고 규제를 개선한다면 5세대(5G)를 기반 삼아 한국이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구현모(사진) 한국가상증강현실산업협회장(KT 사장)은 지난 27일 서울 광화문 KT 사옥에서 기자와 만나 이같이 강조했다. 이미 수년 전부터 VR과 AR 같은 실감 미디어가 신성장동력으로 꼽혔지만 여전히 시장 상황은 척박하다. 이대로는 기업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그간의 기술과 노하우가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감돈다. 이 때문에 구 회장은 앞으로 2년을 VR·AR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 봤다. 그는 “머리에 착용하는 디스플레이 기기인 VR HMD의 어지럼증이 대폭 개선됐고 내년부터는 더 얇고 가벼워질 것”이라며 “게임을 비롯해 높은 수준의 콘텐츠도 계속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올해 상용화한 5G는 ‘성장통’을 겪는 VR·AR 산업에 반전의 기회를 열어줬다. 구 회장은 “대용량의 고화질 영상을 끊김 없이 서비스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며 “동시에 여러 명이 함께 접속해 즐기는 VR 액티비티 등 5G로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기기와 콘텐츠, 네트워크 등 산업을 일으킬 요소가 하나둘 갖춰져도 이용자 기반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구 회장은 “쓸만한 HMD는 40만원대를 넘고 국산은 이보다 50% 이상 비싸다”며 “HMD 가격 장벽을 낮춰 이용자를 늘리는 게 최우선”이라고 힘줘 말했다. 학교를 시작으로 VR HMD 보급률을 높이는 한편 VR 게임방 등 관련 사업자나 개인의 기기 구입 부담을 낮출만한 정책을 도입하는 등 정부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구 회장은 “현재 VR 기기를 구매해서 꾸준히 활용하는 사람이 국내에 3만명 정도인데 30만명 이상까지만 늘어도 생태계가 스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성만 확보되면 기기 개발이나 콘텐츠 확대는 알아서 뒤따른다는 얘기다.
규제 역시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는 “VR체험방의 게임물 등급이 전체, 18세 이상 단 2개 등급뿐이라 적당한 흥미를 갖춘 대중적인 콘텐츠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며 “일반 게임물처럼 4등급으로 나누거나 VR게임에 적합한 새로운 체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우수한 해외 콘텐츠를 들여오고 싶어도 등급 분류가 안 돼 활용하기 어려운 사정도 개선 사항으로 꼽았다.
한국의 VR·AR 산업 수준은 미국의 80% 정도로 1.6년 뒤처진 것으로 평가받지만, 이 같은 정책 지원 노력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구 회장은 내다봤다.
다행스럽게도 정부는 최근 ‘콘텐츠산업 3대 혁신전략’을 내놓고 공공서비스와 산업, 과학기술 분야의 실감콘텐츠 혁신을 위한 ‘XR+α 프로젝트’를 추진할 계획을 밝혀 업계의 기대감은 높아지고 있다.
한편 국내 실감미디어 산업이 변곡점에 서 있는 상황에서 한국가상증강현실산업협회는 오는 2~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코리아VR페스티벌’을 개최한다. 120여개 기업이 300여개 부스를 통해 제조·의료·국방·교육·건축·게임 등 다양한 분야와 융복합한 VR·AR기술을 선보인다. 구 회장은 “기업 간 연결고리 역할은 물론 정부의 주요 프로젝트를 알리는 자리”라며 “한국의 VR·AR 산업의 본격적인 대중화를 이끄는 계기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