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3월 미국 골프닷컴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선수 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주제는 ‘누가 가장 느린 골퍼냐’. 21%의 벤 크레인(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이 지목당한 선수가 바로 재미동포 케빈 나(36)였다. 17%가 그를 슬로 플레이 주범으로 꼽았다. 샷 하기 전 지나치게 많은 왜글(손목풀기) 동작으로 갤러리의 야유를 받기도 했던 케빈 나는 이후 많은 노력으로 플레이 속도를 높이기는 했지만 한 번 굳어진 이미지는 쉽게 바꾸기 어려워 보였다.
그게 불과 2년여 전인데 지금 케빈 나의 이미지는 그때와 180도 다르다. 요즘 팬들의 눈에 비친 케빈 나는 ‘쿨’하고 유머가 넘치며 심지어 골프 기량도 정상급이다. 케빈 나는 7일(한국시간) 라스베이거스 서멀린TPC(파71)에서 끝난 PGA 투어 슈라이너스 아동병원오픈에서 최종합계 23언더파 261타를 적은 뒤 패트릭 캔틀레이(미국)와 연장전에서 승리했다. 우승 상금은 126만달러(약 15억800만원). 5월 찰스 슈와브 챌린지에 이어 5개월 만의 우승이자 통산 4승째다. 케빈 나는 5월 우승 뒤 부상으로 받은 자동차를 즉석에서 캐디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데뷔 첫 우승까지 8년, 2승까지 7년이 걸렸는데 3승은 10개월, 4승은 5개월 만에 해냈다. 특히 데뷔 첫 우승을 달성한 대회에서 다시 우승해 감회가 남다를 만했다. 자택도 라스베이거스에 있다.
케빈 나는 짧은 퍼트 뒤 볼이 홀에 들어가기도 전에 걸어가 집어들려는 동작(워크 인 퍼트)을 취하는데 이 동작은 3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때 타이거 우즈(미국)가 흉내 내 더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현지 팬들이 ‘쿨하다’며 좋아하는 이 동작으로 인기를 이어갔다. 1라운드에는 캐디의 모자 앞면에 ‘Free Bio Kim’을 새겨 눈길을 끌기도 했다. 최근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대회 중 소란스러운 갤러리 쪽으로 손가락 욕을 해 3년 자격정지를 받은 김비오를 위한 메시지였다. 케빈 나는 한 번의 잘못된 행동에 너무 무거운 징계가 내려졌다는 주장을 널리 알리고 싶어 했다.
우승 직후 방송 인터뷰에서는 “허위 사실에도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왔다. 한국 대회(오는 17일 더 CJ컵)에서 뵙겠다”고 한국어로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케빈 나는 결혼 생활을 다루는 국내 TV 예능 프로그램에 최근 출연하려다 과거 파혼과 관련한 논란이 새삼 불거져 출연을 포기한 일이 있었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당하고 떳떳하고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아내·딸과 함께 그린에서 기쁨을 나눈 케빈 나는 8월 얻은 아들에게 ‘최신’ 트로피를 보여줄 수 있게 됐다.
2타 차 단독 선두로 출발한 케빈 나는 10번홀(파5) 트리플 보기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잃었던 타수를 12·13·15번홀 버디로 바로 만회했고 16번홀(파5) 보기로 1타 차 선두를 내준 뒤에는 17번홀(파3) 7m 퍼트를 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티샷을 벙커에 빠뜨리고도 어려운 파 세이브에 성공했다. 캔틀레이는 이 홀에서 티샷을 물에 빠뜨려 보기를 적었다.
18번홀(파4)에서 진행된 첫 번째 연장에서는 버디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같은 홀 두 번째 연장에서 캔틀레이가 3퍼트 보기를 범하는 사이 케빈 나는 파를 지켜 경기를 끝냈다. PGA 투어에 따르면 케빈 나가 이번 대회에서 성공한 퍼트 거리 합계는 약 170m(558피트11인치)로 투어 최고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