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는 4차 산업혁명의 ‘쌀’로 불린다. 고객정보가 많고 정교할수록 이를 활용한 기업의 고객 서비스가 무궁무진해지기 때문이다. 고객 개개인의 누적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보유했느냐에 따라 기업의 경쟁력도 판가름이 난다. 이 때문에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 치열한 데이터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다. 구글·페이스북 등 미국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글로벌 데이터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법적 규제를 통해서라도 이들 기업으로부터 데이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데이터 법안은 유럽연합(EU)의 개인정보보호법(GDPR)으로 자국민의 데이터가 다른 국가로 이전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한다. 데이터 소유권을 사용자인 자국민에게 부여해 기업의 이익창출에 사용자의 데이터가 함부로 이용되지 않게 한 것이다.
국내에서 핀테크의 개념조차 모호했던 수년 전부터 금융당국과 금융권에 이 같은 선진국들의 데이터 경쟁과 데이터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피력해온 인물이 있다. 바로 업계 최고의 데이터 전문가로 꼽히는 김태훈 레이니스트 대표다. 그는 지난 2014년 ‘금융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겠다’는 비전 아래 금융권의 카드 데이터를 수집해 카드를 추천하는 웹 서비스를 시작했다. 또 2017년 흩어져 있는 자산 데이터들을 모아주는 자산관리 애플리케이션 뱅크샐러드를 선보이며 핀테크 업계에서 자기만의 영토를 공고히 해왔다.
뱅크샐러드의 올해 목표를 ‘데이터 중심의 금융사업’으로 세운 김 대표는 최근 본지와 만나 데이터 주권의 이동이 국내 금융시장에 파장을 몰고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큰 변화는 정보 비대칭 해소로 소위 ‘호갱(호구와 고객을 합친 신조어)’이라 불리는, 기업에 이용만 당하는 고객들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그는 “그동안 국내 금융시장은 금융사들이 자사 상품만을 판매하는 직판 중심의 방식으로 운영돼왔는데 이 단독 판매채널에서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정보 비대칭 등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다”며 “이 같은 문제들 때문에 금융상품이 충분히 비교되고 최적의 상품만 살아남는 유통과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금융권에 유통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마이데이터 사업은 금융구조를 직판 중심에서 유통 중심으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금융사에 자신의 데이터 제공을 철회할 수 있는 권한을 이용자에게 부여해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겠다는 취지다. 데이터 활용에 제한이 생기면 금융사들의 수익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김 대표는 “그동안 금융사들이 정보 비대칭으로 초과이익을 거둬왔다면 이제는 정보 대칭 차원에서 사업모델을 구상해야 할 때”라며 “마이데이터 도입 이후 기존 금융사들의 초과이익은 분명 감소하겠지만 정보 대칭이 이뤄져야만 금융업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꼬집었다. 예를 들어 특정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고객의 보험가입을 거절하기보다는 보험료를 많이 받더라도 미래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마이데이터 도입에 맞춰 ‘뱅크샐러드 2.0 시대’를 예고했다. 뱅크샐러드를 금융사가 아닌 금융 데이터 전문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고객의 관점에서 재무상태를 파악하고 재무설계를 하는 데이터 회사가 있어야 금융 생태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며 “그동안 개인의 신용관리에 중심을 두고 자산관리 서비스만 일부 진행해왔지만 앞으로는 ‘고객을 똑똑하게 한다’는 비전에 따라 이용자가 개인의 데이터로 금융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금융권 내 ‘데이터 구글’로 거듭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이처럼 금융구조가 유통 중심으로 바뀌면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금융혜택은 상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뱅크샐러드 카드 추천에 따른 혜택 규모만 현재 260억원, 이용자 1인당 평균 50만원의 실익을 얻었다는 점에서 더 많은 금융 분야의 데이터가 개인 중심으로 이동하면 혜택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연금 같은 경우는 개인의 노후 상황을 정확히 예측해야 하기 때문에 소득, 은퇴 시기 등을 고려한 생애 재무설계 그래프가 필요한데 다수의 개인들이 이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다”며 “개인이 자신의 모든 데이터를 온전히 파악할 수만 있어도 금융관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마이데이터 도입 등 금융권의 혁신을 위해서는 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 등 데이터 3법 시행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법안들은 지난해 11월 발의된 후 여전히 국회에 계류돼 있다. 데이터 3법 시행이 늦어지면 업계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국가 경쟁력도 저하될 수 있다는 게 김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EU·중국 등 주요 강국에서는 개인의 금융정보는 금융사와 기업이 아닌 개인의 것이라는 판단하에 데이터 관련법을 시행하는 등 선진국들은 개인의 데이터 이동권에 대한 실험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3~4년 뒤에 이들 국가의 데이터 경쟁력을 따라잡을 수 없는 때가 돼서야 우리나라는 법안 통과를 두고 1년 넘게 시간을 허비했을까 후회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해외 주요 선진국에서는 여러 마이데이터 사업자가 등장한데다 기존 금융사 역시 이 같은 흐름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자체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미국에서 부상한 마이데이터 시대에 가장 발 빠르게 나선 곳은 씨티은행이다. 씨티은행은 ‘오픈API 서드파티 소프트웨어 생태계 전략’을 세우고 자발적으로 자사의 데이터를 타 업체와 업계에 오픈했다. 씨티은행의 고객 데이터 공개로 금융권 내에 다양한 서비스가 출시되면 이를 통해 혜택을 본 고객들이 씨티은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좋은 혜택을 위해서라도 꾸준히 씨티은행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뱅크샐러드의 목표는 한결같다. 창업 초기의 비전과 같이 회사의 이윤을 추구하기보다는 고객을 똑똑하게 만들겠다는 것. 이 철학에만 집중하면 플랫폼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게 김 대표의 생각이다. 그는 “카드 추천을 통해 카드 발급 주도권이 고객에게 넘어가면서 고객 중심의 생태계가 구축되고 뱅크샐러드도 함께 성장하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며 “뱅크샐러드의 고민은 개인이 더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를 활용해 양질의 분석 결과를 얻어내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직원들의 식사 메뉴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사내 카페를 준비 중이라는 그는 직원들에게, 그리고 업계에서 양심적인 대표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뱅크샐러드가 성장궤도에 진입하면서 다양한 사업기회들을 만나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사리사욕 때문에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며 “회사가 업계에 기여한다는 책임감에 눌려 과도하게 업무를 추진할 수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양심을 잘 유지하고 비전과 철학이 뚜렷한 리더로 남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85년 부산 △부산 양정고 △2004년 서강대 경영학과 입학 △2012년 레이니스트 설립 △2016년 한국핀테크산업협회 1기 부회장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장 수상 △2018년~ 한국핀테크산업협회 2기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