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인 나루히토 일왕이 22일 즉위하면서 세계 평화와 헌법준수 의지를 다시 언명했다. 헌법을 고쳐 전쟁 가능한 국가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최근 행보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메시지다. 아베 정권의 개헌 야심과 우경화 행보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식에서 새 시대를 선언하며 평화주의를 재천명하고 헌법준수 의지를 내세운 것에 국제사회는 주목하고 있다. 나루히토 일왕의 이날 발언은 전임 총리들과 달리 과거사에 대한 반성마저 부정하려 드는 아베 정권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군국주의 부활의 야심에 경종을 울리고 평화주의 물결에 동참하라는 호소로 해석된다. 지난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도 일왕 즉위식을 계기로 이전의 미래지향적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전문가들은 일왕 즉위식 참석차 방일한 이낙연 총리가 아베 총리와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한일관계를 복원하는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린 후 청와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과 일본의 경제보복 등 1년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강대강 대치 국면을 이어온 양국관계에 개선의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냉엄한 나라 안팎의 경제 현실을 직시하며 실리외교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나루히토 일왕은 이날 오후 도쿄 지요다구 소재 고쿄(皇居) 규덴(宮殿)에서 즉위를 내외에 선언한 뒤 “국민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항상 바라며 헌법에 따라 일본과 국민들의 통합의 상징이 될 것을 맹세한다”고 천명했다. 이날 즉위식은 아베 총리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 이낙연 국무총리, 왕치산 중국 국가 부주석, 영국의 찰스 왕세자,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등 183개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약 30분간 진행됐다. 나루히토 일왕이 발언을 마치자 아베 총리는 그의 발언 내용을 되새긴 후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경애의 마음을 다시금 새롭게 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전후 세대(1960년생)인 나루히토의 즉위로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퇴임한 아키히토 일왕 시대와 달리 2차 대전의 뼈아픈 역사에서 벗어나 과거와 절연하고 경제성장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국가로 다시 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 일왕의 이날 평화주의 강조와 헌법수호 의지 재천명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돌아가겠다는 비뚤어진 역사인식과 패권주의의 야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자칫 새 일왕의 평화주의 신념이 아베의 우경화 움직임에 묻힐 경우 일본의 미래는 물론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적 형세와 한일관계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더구나 한일관계는 과거사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최악의 갈등 국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일관계는 과거 수차례 갈등과 관계개선을 반복했지만 지금처럼 대화가 차단되고 민간교류가 단절된다면 경제 분야를 비롯한 양국 피해의 파장은 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다.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의 해법은 결국 양국 정상의 대화에서 시작돼야 한다.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 이 총리가 참석함으로써 모처럼 한일 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양국관계의 개선 의지를 담은 문 대통령의 친서가 아베 총리에게 건네질 것으로 관측되는데, 가능하면 연내 이른 시일 안에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국 실무선의 간극을 좁히는 진지한 절충 노력도 따라야 한다. 양기웅 한림대 글로벌협력대학원 원장은 “일왕의 헌법수호 메시지는 일본 내의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입장을 일왕이 대변했다는 것을 의미 깊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홍병문 국제부장 hb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