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반도체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이 반도체 성능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최첨단 장비를 중국에 납품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차세대 이동통신 5세대(5G) 전략과 ‘반도체 굴기’를 펼치는 데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7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ASML이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국영 SMIC에 올해 말까지 납품하기로 했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공급을 보류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한 관계자는 “ASML은 중국에 최첨단 장비를 공급해 미국을 자극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납품을 일단 보류했다”고 전했다.
EUV 노광장비는 ASML이 독자 개발하고 독점 생산하고 있어 현재로서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반도체 성능 향상은 회로 선폭을 얼마나 미세하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미세화 공정에 이 노광장비가 필수적이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도 올해부터 첨단제품 양산에 이 장비를 도입했다.
SMIC는 삼성전자·TSMC에 비해 파운드리 기술력 수준이 걸음마 단계여서 당장 EUV 노광장비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중국 정부의 자금을 등에 업고 TSMC 등을 추격하려던 계획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5G 서비스가 본격화하면 스마트폰 등의 데이터처리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만큼 반도체 성능 향상이 시급한 상황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지난해 15%에 머문 반도체 자급률을 내년에 40%, 오는 2025년에는 70%로 높인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반도체 굴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SMIC에 대한 ASML의 납품 보류 결정은 첨단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마찰이 격화하는 데 따른 행보로 풀이된다. ASML은 반도체 장비 부품의 약 20%를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자사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미국 반도체 기업도 주요 고객으로 두고 있다. 지난해 매출에서 미국이 차지한 비중이 16%에 달해 미국의 규제를 받게 되면 타격이 크다.
하지만 ASML 입장에서 중국 매출 비중이 더 높아 기존의 납품계획이 완전히 철회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이 35%로 가장 높으며 중국이 20%로 그다음이다. 이 때문에 미중 간 긴장완화 추이를 지켜보며 납품 재개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