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저 기억하세요? OO게임 잡지사 다닐 때 뵀는데. 악수 한 번만 해주세요.” 인터뷰 도중 불쑥 등장한 한 중년 남성은 자신을 빠르게 소개하더니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벨 소리는 다름 아닌 ‘태권브이’ 주제가. 마치 짠 듯한 이 장면은 ‘김청기의 동심’이라는 이름을 단 그의 기념관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모습이다.
지난해 11월24일 문을 연 기념관은 일주일 뒤면 개관 1주년을 맞는다. 어릴 적 향수를 좇는 중년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또는 또래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곳을 찾았다. 김 감독은 “김청기라는 한 인간이 존재하는 건 팬들 덕분”이라며 “내가 항상 있을 수는 없지만 자주 들러서 사인이라도 한 장 더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기념관에는 김 감독이 애지중지하던 소장품이 한데 모여 있다. 태권브이 원화와 대본, 촬영기기는 물론 우뢰매 촬영 당시 심형래에게 직접 분장을 해주는 사진 등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 태권브이 개봉 연도를 기념하는 76.7㎝ 크기의 대형 태권브이 피규어부터 ‘태권브이 덕후’를 자처하는 수집가들이 기증한 수십종의 피규어도 진열돼 있다.
이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엉뚱 산수화’라는 이름이 붙은 조선 시대 풍경화. 검푸른 묵으로 그린 산 아래 정승처럼 우뚝 서 있는 태권브이부터 풍경을 즐기고 있는 양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태권브이까지 말 그대로 엉뚱한 산수화다. “태권브이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40~50대가 되면서 하는 말이 자꾸 ‘옛날’이라는 거야. 정작 나는 태권브이를 만들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래서 아주 더 멀리 조선 시대로 보내버리자고 생각했지.”
팬들과의 대화 도중 아이디어를 얻은 엉뚱 산수화는 2008년부터 20여점을 그려 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태권브이 40주년이었던 2016년에는 서울·대구·부산의 롯데백화점 갤러리에서 특별전을 열었고, 지난해에는 경북도청에서 한달간 전시회를 진행했다. 김 감독은 “이질적이라고 싫어할 줄 알았는데 팬들이 재밌게 생각해주고 오히려 잘 그렸다고 칭찬까지 한다”며 웃었다.
팬들의 태권브이 사랑은 노장이 된 김 감독을 계속 움직이게 한다. 그는 차기작 준비는 물론 태권브이와 우뢰매의 리메이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앞서 2007년 복원돼 재개봉한 태권브이는 전국 180개 스크린에서 상영됐으며 13일 만에 5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는 “태권브이는 내 전부”라며 “태권브이를 추억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