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던 1940년대 후반 틈만 나면 적산가옥의 화장실 회벽에 그림을 그리던 소년은 아버지의 꾸지람 대신 칭찬을 들으며 만화가를 꿈꿨다. 미8군 부대가 가져온 코믹북 속 미키마우스를 보며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열여덟살에 첫 만화책을 내고 전업 만화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종로 한복판에 모인 사람들이 만화책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청소년 비행 관련 기사가 한 줄만 나와도 만화가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던 세상이었다. 혼란의 시기를 겪던 청년은 우연히 미국에서 건너온 디즈니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보고 애니메이션에 매료돼 곧장 영화사의 문을 두드렸다. 그로부터 12년 후 그는 아이들의 영웅 ‘태권브이’의 아버지가 됐다. 1970년 한국 상업 만화영화 시대를 화려하게 쓴 김청기(78·사진) 감독을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서 만났다. 팔순을 코앞에 둔 노신사는 팔각모의 빵모자를 고쳐 쓰고는 “남들은 대머리인 줄 아는데 멋있어서 쓰는 거야”라며 ‘씨익’ 웃었다. 까만 뿔테 안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에는 아직도 장난기가 가득했다.
김 감독의 대표작 ‘로보트 태권브이’가 대한극장에 걸린 1976년 여름을 묻자 그는 “세상이 주먹만 해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일 안팎의 개봉기간 동안 당시 대한극장에 21만명, 세기극장에 8만명이 몰려들면서 대히트를 쳤다. 지금으로 치자면 천만관객이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일주일 동안 매회 매진되니까 기다리던 관객들의 원성이 높아져 버스까지 대절해 다른 극장으로 실어 나르고 그랬지.”
청년 시절 김청기는 감독이 아니라 작가였다. 열여덟살에 펜싱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감명받아 그린 만화 ‘무적의 오프린’으로 데뷔해 6년여간을 전업 만화가로 지냈다. 그러다 1964년쯤 대한극장에서 ‘백설공주’를 보고 한국의 디즈니를 꿈꾸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전향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완전히 입체적이고 스토리에 음악까지 어우러지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더라. 한마디로 충격적이었고 곧장 만화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세기영화사에 들어가 ‘홍길동’, ‘황금철인’ 등의 만화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영화판에서 극장용 만화영화는 기술 수준은 물론 그 자체로도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자 김 감독은 1970년대 초 광고대행사의 CF 파트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산업화가 일면서 CF 광고들이 쏟아질 때라 그는 ‘라면땅’ ‘캉캉스타킹’ ‘감기약 판토’ 등 수많은 TV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당시 꽤 많은 돈도 벌었다. 김 감독은 “아내가 아직도 말해. 장편 만화영화를 안 하고 계속 CF만 했으면 지금 빌딩 몇 채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다만 당시 30대 청년 김청기는 그 돈을 모두 쏟아부어 태권브이 제작에 돌입했다. 작업실이 있던 광화문을 지나며 바라본 이순신 장군 동상을 참고해 투구를 씌우고 각종 무기가 아닌 태권도로 적을 제압하는 로봇을 구상해냈다. 태권도 동작은 유단자들을 불러 모아 대련을 시킨 뒤 16mm 흑백 카메라로 찍어 만들었다. 당시 디즈니가 하던 기법으로 한국에서는 처음이었다. 디즈니를 롤모델로 삼은 만큼 작품 수준을 올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래서 그림도 최초 목표인 1만8,000장의 배에 달하는 3만2,000장을 그렸다. “1초에 24장을 그리는 디즈니는 못 따라가도 1초에 4~5장 그리는 일본 수준은 넘고 싶었다”며 “8개월 동안 밤낮없이 작업했더니 1초에 12장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태권브이의 디자인이 당시 흥행하던 일본 만화 마징가제트에서 따왔다는 비판도 있지만 김 감독은 이야기 구성과 설정에는 창의적 아이디어였다고 강조했다.
태권브이가 나오고 충무로에는 김 감독이 돈방석에 올라앉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떼돈은커녕 오히려 그는 사당동에 있던 집 한채를 잃었다. “작품 수준을 높이다 보니 제작비도 많이 들었고 당시 극장의 횡포도 어마어마했다”며 “세상에 내 이름 석자를 알렸지만 빚이 쌓여 결국 집을 팔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만화영화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2년 뒤 만든 반공영화 ‘똘이장군’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태권브이를 제작하기 2년 전부터 구상해놓은 똘이장군은 마침 ‘제3땅굴’ 사건과 개봉시기가 겹치면서 큰 흥행을 거뒀다. 김 감독은 “태권브이가 내 큰아들이자 자존심이라면 똘이장군은 둘째 아들이자 내 기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컬러TV가 등장하고 일본 TV용 애니메이션이 들어오면서 만화 가게는 비디오 가게로 변했고 극장을 찾는 발길이 끊어졌다.
태권브이와 똘이장군의 시리즈 부진으로 침체를 겪던 김 감독은 1986년 한국 최초로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합성한 우주공상 과학영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를 내놓았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개그맨 심형래가 맡은 ‘에스퍼맨’이 우주의 적으로부터 지구를 수호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유머와 역동적 이미지로 당시 40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김 감독은 “슈퍼맨을 보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히어로이지만 생활 속에서는 어리숙하지 않느냐”며 “에스퍼맨은 아주 극단적으로 바보가 극적인 변신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후 1997년 ‘의적 임꺽정’을 끝으로 작품활동을 접은 김 감독은 1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꿈을 꾸고 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 고전동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것이다. 첫 타자는 ‘심청’으로 5대 판소리를 뮤지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것이 목표다. 이미 심청은 스토리보드를 완성했고 동양화풍의 2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다. 김 감독은 “디즈니도 몇 가닥의 뻔한 이야기를 감동과 재미를 곁들어 풀어나간다”며 “진부할 수 있는 소재지만 심청과 같은 고전 동화도 심도 있게 극화하면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특히 그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개최를 기념해 초연된 윤이상 선생의 오페라 ‘심청’을 언급하며 “현대 악기를 가미해 판소리를 편곡하면 완전히 새로운 뮤지컬 만화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예로 들며 심청과 심봉사의 서사를 웅장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감독은 동작은 물론 효과음까지 묘사해가며 10여분을 쉬지 않고 ‘심청’에 대해 설명한 후 그제야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한국 애니메이션 감독 중 가장 고령인 그가 여전히 현역인 이유다.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41년 서울 △1964년 서라벌예술대 회화과 학사 △1961~1966년 만화가 생활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 감독 △1978년 ‘똘이장군’ 감독 △1986년 ‘외계에서 온 우뢰매’ 감독 △1991년 김청기필름 대표 △1997년 ‘의적 임꺽정’ 감독 △ 1999년 청강문화산업대 겸임교수 △2004년 문화콘텐츠 앰배서더 대표 △2004년 제8회 서울국제만화 애니메이션페스티벌 공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