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독립국, 그것도 전쟁을 치르는 나라가 어떻게 이 정도의 화물선을 갖게 됐을까. 젊은 사업가의 꿈과 집념에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맞물린 덕분이다. 고려호의 원래 이름은 가즈우라마루(和浦丸). 미쓰비시조선이 북미산 목재 운반용으로 1938년 건조했다. 진주만 공습 두 달 전에 구 일본 육군에 징발돼 군용 수송함으로 쓰이다 1945년 7월 말 종전 직전 부산 앞바다에서 침몰, 패전을 맞았다. 침몰 원인은 미 해군이 매설한 기뢰 접촉.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두 가지 이유에서 이 배를 인양하려 애썼다.
첫째는 부산항의 장애물 제거. 입출항할 때마다 바다에 누운 큰 덩치의 화물선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다. 둘째는 인양 수리 후 국적 화물선 활용. 신생 대한민국은 의욕적으로 인양을 추진했으나 기술이 부족한데다 6·25전쟁까지 터져 진도를 못 내던 때 35세 청년 실업가 남궁련씨가 침몰 선박 인양 불하권을 따냈다. 그는 1만톤급 국적 화물선을 보유하게 될 경우 국가적 이익을 관계 요로에 설득, 70만달러에 이르는 정부 지원금으로 일본에서 배를 완전히 고쳤다. 월성(月星)호를 거쳐 고려(高麗)호로 개명된 이 배는 고철을 미국에 내려놓고 수입 목재와 원조 양곡을 싣고 돌아왔다.
무엇보다 특이했던 점은 첫 출항의 승무원. 해군참모차장(준장)인 박옥규 제독이 선장을, 권태춘 대령이 기관장을 맡는 등 현역 해군 장교들이 대거 동원됐다. 한국 최초의 본격 화물선의 미주 항로 투입은 민간 사업이었으나 실은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 국가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유수의 해운국에 오른 것은 세계적인 안목을 지닌 청년 실업가의 꿈과 노력, 거국적 지원, 인력 양성이라는 3박자가 어우러진 결과다. 미국은 경험 많은 일본인 해기사 인력을 채용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해운의 개척자들이 한사코 승무원 전원 한국인 채용을 고집한 결과 대규모 인력 양성과 관련 산업 성장으로 이어졌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