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투자자 A씨는 고위험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전문투자자 요건이 지난 21일부터 완화됐다는 정부의 발표를 듣고 최근 등록하기 위해 증권사를 찾았다. 하지만 증권사 직원은 “현재는 불가능하니 기존에 업무를 맡았던 금융투자협회에 문의하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정부의 규정 개정이 늦어지면서 시스템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금투협 역시 “제도 변경 이후 업무가 증권사로 이관됐다”며 등록을 거부했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전문투자자 등록 활성화 방안이 공식 발표와는 달리 현장에서는 실행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위원회는 성장 가능성이 크지만 투자 위험 역시 높은 혁신기업에 대한 모험자본 공급을 확대하기 위해 투자 전문성이 있고 손실을 감내할 능력이 있는 ‘전문투자자’ 등록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8월 개정했다. 기본요건인 금융투자 계좌 잔액 기준은 ‘5억원 이상’에서 ‘초저위험 상품 제외 5,000만원 이상’으로 낮췄다. 소득요건은 ‘본인 소득 1억원 이상’ 소득 기준에 ‘부부 합산 1억5,000만원 이상’ 요건이 추가됐다. 자산요건은 ‘총자산 10억원 이상’에서 ‘총자산에서 거주 중인 부동산·임차보증금 및 총부채 차감액 5억원 이상’으로 변경됐다. 소득요건과 자산요건 둘 중 하나만 충족하면 된다.
또 소득이나 자산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하더라도 △회계사·감평사·변호사·변리사·세무사 △투자운용인력·재무위험관리사 등 시험 합격자 △금융투자업 주요 직무 종사자 등은 전문투자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외에도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금투협 인정 절차를 폐지하고 증권사에서 심사 후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금융위는 다만 업무 이관을 받은 증권사들이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3개월의 유예기간을 둬 11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식 시행 시기가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시스템을 갖춘 증권사는 현재 단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사모펀드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위에서 세부 규정을 당초 예정보다 늦게 내놓았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세부 규정이 시행 하루 전날인 20일에야 나왔다”며 “아직도 일부 사항에 대해서는 금융위의 최종 유권해석이 나오지 않아 시스템 구축 작업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 관계자도 “각 증권사별로 세부 문의가 산발적으로 들어와 이를 취합해 금투협을 통해 일괄적으로 업계에 전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금투협에서는 금융위가 세부 사항을 확정해주면 다음달 초 전체 증권사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일례로 인정계좌 잔액 5,000만원에 포함되는 금융 상품에 해외 주식 및 채권이 어디까지 포함되는지, 순자산 5억원 계산 시 포함되는 자산과 빠지는 부채의 범위 및 증명 방법에 대한 세부 방안의 경우 증권사 담당자들 사이에서 혼선이 큰 상황이다.
이에 따라 아무리 일러도 다음달 말, 상당수 증권사는 내년에야 시스템을 갖춰 전문투자자 등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사 관계자는 “회사마다 준비 상황이 달라 시행 시점도 다를 것”이라며 “차익거래결제(CFD)와 같은 파생상품에 투자하기 위해 연말에 전문투자자 등록에 관심을 갖는 개인투자자들로부터 문의가 오고 있지만 등록 가능 시기에 대해 확답을 못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준비 없이 제도를 시행하면서 투자자들과 업계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사모펀드 판매 최소금액을 1억원에서 3억원으로 올리는 사모펀드 판매규제 강화 후 사모펀드 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전문지식이 있고 능력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많은 전문투자자가 나올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전문투자자로 등록하면 최소가입금액 등의 판매규제를 받지 않고 다양한 사모 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이에 자산운용사와 증권사들은 전문투자자가 늘면 사모 시장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해왔지만 시행 초기부터 현장에서는 전혀 딴판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 개인투자자는 “정부와 업계가 별다른 준비도 없이 ‘일단 하고 보자’식의 제도 시행을 강행하는 바람에 어디서도 전문투자자 등록을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해 난감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