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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20세기 인류기술 중 가장 큰 충격..사용 아닌 보유 목적돼야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17> 원자폭탄

눈부신 섬광·치솟는 불덩이·후폭풍..

세계 첫 원자폭탄 시험 지켜본 호닉

"가장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장면" 회고

美, 한달 뒤 히로시마에 실전 투하

조선인 징용공 수만명도 맨몸 피폭

생존해도 평생 고통 속에 머물다떠나

시험용 폭탄 옆을 지키는 도널드 호닉 /원자헤리티지재단 페이스북시험용 폭탄 옆을 지키는 도널드 호닉 /원자헤리티지재단 페이스북



1945년 7월15일 밤, 미국 뉴멕시코주 남부 앨라모고도에서는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시험을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다. 황량한 사막 가운데 30m 높이의 철골 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탑 위에 설치된 작은 움막 안에서 플루토늄 폭탄의 최종 조립 작업이 이뤄졌다. 완성된 폭탄은 지름이 사람 키 정도 되는 구 형태를 띠고 있었고, 구 표면에 설치된 TNT를 동시에 기폭하기 위한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폭발 순간이 되면 TNT가 먼저 폭발하면서 플루토늄-239 연료를 구의 중심을 향해 밀어 넣게 될 것이었다. 플루토늄 연료가 한곳에 모여 임계질량을 넘어서면 핵분열 연쇄반응이 시작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분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예정된 작업을 마친 후 작업자들은 모두 철수했다.

그날 어둠이 내려앉자 예측불허의 여름 사막 날씨답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총 책임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젊은 화학자 도널드 호닉(1920~2013)을 곁으로 불렀다. “자네가 올라가서 밤새 폭탄을 지키는 것이 좋겠네.” 오후9시쯤 호닉은 어둠 속에서 비바람을 뚫고 사다리를 타고 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의 뒷주머니에는 본부와 교신을 주고받을 무전기와 심심풀이로 읽을 책이 한 권 꽂혀 있었다. 호닉은 ‘장치’라는 별명을 가진 원자폭탄 옆에 걸터앉았다. 가지고 올라간 책을 읽으려 펼쳐 들었지만 하늘을 찢는 듯한 천둥과 번개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자정이 넘어가자 비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호닉은 탑에서 내려와도 좋다는 무전을 받았다.


호닉이 탑에서 내려온 후 시험 시간이 최종 결정됐다. 예정된 시간은 오전5시30분이었다. 5시가 넘어가자 과학자들은 각자 준비해온 검은색 안경을 꺼내 들었다. 5시10분부터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약 20분 후인 오전5시29분45초, 역사적인 원자폭탄 시험이 시작됐다. 폭심지로부터 8㎞가량 떨어진 벙커에서 과학자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눈부신 섬광이었다. 잠시 후 거대한 후폭풍과 엄청난 굉음이 뒤따랐다. 그 뒤에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시험 장면을 16㎞ 이상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한 헌병대원은 “태양과 같은 열기가 얼굴 위로 쏟아졌다”고 회상했다. 훗날 호닉은 오렌지 색으로 빛나는 불덩이가 하늘로 소용돌이치며 치솟는 모습이 자신이 본 “가장 미학적으로 아름다운(aesthetically beautiful)” 장면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호닉은 만 25세였다.

1945년 8월6일 미군 폭격기로부터 원자폭탄을 맞고 폐허로 변한 일본 히로시마 /서울경제DB1945년 8월6일 미군 폭격기로부터 원자폭탄을 맞고 폐허로 변한 일본 히로시마 /서울경제DB


호닉이 목격한 빛나는 불덩이는 그로부터 몇 주 후 일본 히로시마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 그것을 지켜본 것은 일본인들만이 아니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5만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그로부터 2년 전 징용공으로 동원된 젊은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후방의 군수공장에 일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는 조선에서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녀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는 인력을 동원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완곡하게 ‘응징사(應徵士)’ 즉 징용에 응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1923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난 최염(崔念)이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서 갓 스무살이 된 청년들 수백명과 함께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히로시마에 도착한 것은 1943년 가을의 일이었다. 이들은 모두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 조선소에 배속돼 군함을 건조하는 일을 하게 됐다.


1945년 8월5일 밤, 또 한 기의 원자폭탄이 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언섬에서 완성됐다. 이번에는 우라늄-235를 주 연료로 하는 폭탄이었다. 완성된 폭탄을 탑재한 B-29 폭격기는 북서쪽으로 2,500㎞ 떨어진 히로시마를 향해 이륙했다. 폭격기가 6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이튿날 아침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했을 무렵, 조선인 ‘응징사’ 최염은 미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한 건물 소개(疏開) 작업에 한창이었다. 방공용 공터를 확보하기 위해 주택이나 상가건물을 철거하는 작업이었다. 징용공들은 무더운 여름 날씨에 겉옷을 벗고 ‘난닝구’ 차림으로 철거 잔해물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로 ‘웅~’ 하는 폭격기 엔진음이 들렸다. 단 한 대의 은색 비행기가 하늘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지겹도록 울리던 공습경보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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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8시15분께, 눈부신 섬광이 번쩍인 후 최염은 몸이 번쩍 들리는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폭심지 가까이에서 폭탄의 위력을 맨몸으로 받아냈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맨눈으로 섬광을 바라보자 한동안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다. 온몸에는 화상을 입었고, 후폭풍으로 날아든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이날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조선인 5만여명 가운데 약 10분의1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된 생존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후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 뒤 여러 종류의 암이 발병해 사망하기도 했다. 특히 조선인 징용공들의 거주지는 폭심지에서 비교적 가까웠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 미국인 과학자 호닉은 원자폭탄 폭발을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표현했지만, 그의 동년배 조선인 최염은 그것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최염은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원자폭탄은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테크놀로지 중 가장 인상적이고 충격이 크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히로시마에서 최초의 원폭 투하를 감행한 지 3일 후인 8월9일, 두 번째 폭탄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 두 차례에 걸친 원폭 투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전으로 이끄는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 이후 세계 강대국들 사이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핵 확산’은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미국에 이어 소련(1949년)·영국(1952년)·프랑스(1960년)·중국(1964년)·인도(1974년) 등이 차례로 핵 보유국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핵무기는 다른 테크놀로지와는 다른 특징을 갖게 됐다. 1945년 8월 두 차례의 원폭 투하 이후 단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다. 즉 사용이 아닌 보유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2019년 11월2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히로시마에서 전한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 이곳에서 섬광의 폭발과 화염에 휩싸여 그토록 많은 사람, 그토록 많은 꿈과 희망이 죽음의 그림자와 침묵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침묵의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외침을 오늘날까지도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왔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의 면전에도 영원한 흔적을 남긴 무시무시한 시간 속에서, 그 모든 것이 같은 운명에 휘말려버렸습니다.” 최염과 같은 조선인 사망자에 대한 애도이자 생존자에 대한 위로였다. “실로 우리가 진정으로 더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고 싶다면 우리 손에서 무기를 떼버려야 합니다.”

최초의 원자폭탄을 온몸으로 경험한 두 청년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끝맺도록 하자. 엘리트 과학자였던 호닉은 전쟁이 끝나고 브라운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중 린든 존슨 전 미국 대통령의 과학 자문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임기 중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주도하는 등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큰 흔적을 남겼다. 최염의 이야기는 허광무의 책 ‘히로시마 이야기(선인)’에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여러 회원들이 구술한 이야기를 종합해 ‘최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최염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다. 히로시마에서 생존한 여러 조선인 청년들은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 /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백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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