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관이 사건 현장에서 총도 쏘고 직접 범인도 ‘때려잡는’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를 제외하고 현장감식을 토대로 증거수집·분석을 주 업무로 하는 과학수사관은 범인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드물다. 올해로 20년째 과학수사관의 외길을 걷고 있는 나제성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 반장에게는 예외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산전수전에다 공중전까지 다 겪다 보니 그는 운(?) 좋게도 눈앞에서 직접 범인을 잡은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지난 2000년대 초반 서울 대학가에서는 노트북 절도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절도범은 대학교 실험실 등을 돌며 학생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노트북을 훔쳐 달아났다. 피해 학생들 입장에서는 값비싼 노트북을 잃어버린 것도 문제지만 공들여 쓴 논문이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서울 성북경찰서 현장감식팀 소속으로 절도사건 현장에 출동한 그는 펑펑 울고 있는 대학원생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학생은 몇 달 동안 밤잠까지 설쳐가며 피땀 흘려 쓴 논문이 저장된 노트북을 도둑맞았다며 꼭 좀 찾아달라고 하소연했다. 나 반장은 어떻게든 노트북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섰지만 막막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감식기법이 발달하지도, 그렇다고 학교 곳곳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형사들의 탐문수사와 CCTV 분석을 통해 용의자를 특정한 뒤 학생들에게 용의자가 다시 학교에 출몰하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추운 가을날 강력팀이 현장에서 철수한 사이 주변에 있던 나 반장에게 학생의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망설일 새도 없이 학교 앞 정류장까지 용의자를 추격해 격투 끝에 현장에서 검거했다. 나 반장은 “범인을 꼭 잡아 어린 학생들의 노력이 담긴 노트북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수십년간 수련해온 합기도 덕분에 범인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경찰 조사 결과 용의자는 무려 150여건에 달하는 노트북 절도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노트북을 돌려받은 학생들로부터 팬레터가 쏟아졌고 직접 찾아와 감사함을 전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때 처음 인연을 맺은 학생들 가운데는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연락하며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나 반장은 “지금은 다들 어엿한 가장이 됐지만 1년에 한두 차례씩 만나 소주 한잔하면서 옛날 얘기를 한다”며 “다들 소중한 인연”이라고 전했다. /김현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