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시대로 이동시켜준 타임머신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과거에 갇혀 영영 본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면 21세기 문명의 이기를 다 누리고 살던 당신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간 ‘문명 건설 가이드’는 이 같은 상황을 가정한 책이다. 책의 제목대로 길을 잃은 시간 여행자를 위해 문명을 일구는 데 필요한 과학·공학·기술·예술·철학 등 모든 지식을 담았다. 영어 원제가 ‘모든 것을 발명하는 방법(How to invent everything)’인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도구와 기계의 원리를 만날 수 있다.
저자 라이언 노스는 마블 코믹스 ‘스쿼럴걸’ 시리즈와 ‘공룡 만화’ 웹툰 작가로, 기발한 상상력과 타고난 유머 감각을 자랑한다.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독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도록 만든 게임북은 뉴욕타임스(NYT)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신간 역시 내용과 형식 모두 신선하고 유쾌하다. 방대한 기술 문명의 역사가 흥미진진한 어드벤처 게임처럼 다가온다. 길 잃은 시간 여행자에게 꼭 필요한 식량과 깨끗한 물 등을 얻기 위한 방법도 있는데, 죽기 싫으면 반드시 챙겨야 할 기초 영양소를 꼽으며 ‘배달 음식과 가공식품이 없는 과거에 갇힌 덕분에 오히려 건강해질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책에 10㎝ 길이의 자 그림을 넣어두기도 했다. 부피, 질량, 힘, 에너지, 시간 측정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 밖에도 베토벤의 악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심지어 원소주기율표까지 온갖 지식을 꾹꾹 눌러 담았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 시대로 간다면 그 시대의 왕으로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라고 거들기도 한다.
하지만 마냥 가볍기만 한 책만은 아니다. 석기시대, 농경시대, 산업시대를 거치며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태동하는 인류 문명사의 흥미진진한 지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책이 다루는 모든 분야의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 든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로서 성공할 수 있던 비결은 도구를 발명하고 사용하는 능력과 그 지식을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체적 한계·경제적 필요·환경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를 창조해냈고, 인류의 그 위대한 여정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저자가 풀어낸 그 여정은 전에 없이 유쾌하다. 2만2,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