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산 소월리에서 길이 6세기 경에 만들어진 74.2㎝의 목간이 발견됐다. 같은 유적에서 나와 지난 3일 공개된 사람 얼굴 모양의 토기 아래에서 출토된 것이다. 총 여섯 면에 걸쳐 한자가 빼곡하게 적힌 이 목간은 인근 지역의 토지 현황을 기록한 당시의 토지관리 문서로, 신라시대 지방 촌락의 토지 현황과 조세 제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9일 경산 소월리 유적에서 토지 관련 목간이 추가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지난 6일 진행한 1차 판독에 따르면 총 여섯 면에 걸쳐 약 94자의 글자가 적혀있다.
목간은 서체나 내용으로 볼 때 6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육 면에 적힌 글자들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논을 의미하는 고유 한자인 답(畓)를 비롯해 곡(谷), 제(堤) 등의 글자와 토지면적 단위인 결(結), 부(負) 자 등이다. 이를 통해 당시 지방 촌락의 조세 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경산에는 골짜기(谷)를 배경으로 형성된 일정 집단이 있었으며,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한 둑(堤)이 조세 부과와 연관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으며, 이를 대상으로 조세를 수취하던 중앙 정부의 지배 양상도 엿볼 수 있게 됐다.
전경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은 “답(畓)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 561년 건립)에 처음 등장한다고 여겨진 한자”라며 “목간 제작연대도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결(結)과 부(負)는 지금까지 삼국통일 이후 사용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사용 시기를 6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부연했다.
굽은 나무 조각에는 글자를 연습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적혀있다. 목간의 두 개 면에는 주(柱), 제(堤), 심(心), 사(四) 등의 한자가 반복적으로 쓰였다. 이에 대해 전 주무관은 “글자 양이나 연습 흔적을 보면 연습 이후에 정식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앞서 출토된 삼 면에 사람 얼굴 모양이 있는 토기는 목간보다 한 세기 앞선 5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됐다. 김상현 화랑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토기 발굴 당시 싸리나무 같은 것이 함께 있어 발굴하게 됐다”며 “두 유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지름 1.6m인 원형 수혈 유구는 깊이 약 1.6m까지 발굴된 상태로 토기와 목간은 깊이 80㎝ 부근에서 출토됐다. 연구원은 수혈 유구의 깊이가 약 2m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차 판독이 완료된 목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수습 및 응급보존처리 등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추가 판독 및 연구 과정을 거쳐 목간에 대한 해석과 시기 등을 밝힐 계획이다. 발굴조사 현장은 오는 11일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