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활용도가 떨어지는 사전회생계획제도(Pre-Packaged Plan·P플랜) 조기 정착에 나선다. 내년에도 경기 부진이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에 기존 구조조정 프로그램 정비에 나선 것이다. 정부는 P플랜 과정에서 투입되는 정책자금이 시장 자율 구조조정의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존 정책금융기관 중심의 구조조정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민간 자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다.
9일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 지원 방안을 마련해 내주 발표할 예정인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에 담을 계획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시장 자율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핵심은 법정관리(기업 회생절차) 문턱에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신규 자금대여(DIP금융)와 자율 구조조정(ARS) 제도 활성화를 통한 P플랜 조기 정착이다. 경영위기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법원 관리에서 벗어나 정상화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다.
P플랜은 채무조정과 신규자금 지원 등 회생계획 방안을 미리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만큼 법정관리 기간이 단축된다. 하지만 활용도가 낮다. 운영에 있어 융통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P플랜에 들어가고 싶어도 회생법원을 드나드는 기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자금을 유치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지난 2018년 서울회생법원이 문을 열었지만 P플랜에 따라 회생을 마친 기업은 골프장 운영 업체인 레이크힐스순천 등 4곳에 그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안창현 법무법인 대율 대표변호사는 “P플랜을 하고 싶어도 채권자 동의와 협조가 있어야 하고, 자금 지원 약속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사전 회생계획 논의단계에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DIP금융 재원이 보강되면 자연스럽게 P플랜도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형 로펌의 한 회생전문 변호사는 “DIP금융이 마중물이 되면 시중은행 자금을 끌어들이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말했다.
현재는 캠코와 중소기업진흥공단이 각각 300억원과 100억원씩 조성한 재원으로 DIP 금융을 회생기업에 지원하고 있다. 정부는 한정된 재원이 자금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DIP 금융 규모 자체를 늘리는 방안은 현재 검토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기업 수요를 봐 가면서 재원을 늘릴 수는 있겠지만 현 단계에서 규모를 키울 계획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기업 회생 분야 한 전문가는 “현재 캠코가 보유한 DIP 금융 재원으로는 규모가 큰 몇 개 기업만 지원해도 소진된다”며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P플랜 등 구조조정 프로그램 활성화에 나선 것은 경기 부진으로 내년도 기업 경영이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경제정책방향에 담을 구조조정 지원 방안도 대상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눠 준비하고 있다. △자발적으로 선제 구조조정에 나서려는 기업 △이미 구조조정에 들어간 기업 △구조조정을 마쳤지만 신규 자금을 필요로 하는 기업 등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조사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지난해 6월 이후 1년 6개월째 기준선인 100을 밑돌고 있다. 경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더 많다는 뜻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한 간담회에서 “우리 산업과 기업이 겪는 파고가 생각보다 깊고 장기간 지속될 수 있다”며 “구조조정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인 기업 비중은 지난 2016년 31.8%에서 지난해 35.2%로 커지는 등 부실기업이 늘고 있다. 이자보상비율은 영업이익 대비 이자비용 비율로, 100%을 넘지 못하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낸다는 의미다.
/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